2007/11/07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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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씨 별세]‘현다이’와 함께한 한국차의 神話 《21일 오전 1시(한국 시간)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선 한국 자동차 산업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었다. 현대자동차가 1985년 미국 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지 20년 만에 현지 공장을 짓고 준공식을 가진 것이다. 같은 시각 현대차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을 맡아 지금의 현대차를 키워낸 ‘포니 정’ 정세영(鄭世永)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독감이 폐렴으로 진전되면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준공식은 1시간가량 진행됐고, 이로부터 10시간 남짓 흐른 낮 12시 30분경 정 명예회장은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졌다. 자신의 분신이었던 현대차가 새 역사를 만든 바로 그날 그는 세상을 떠났다.》
○ 현대그룹과 인연 맺기
정 명예회장은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 마이애미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정치인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맏형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름을 받고 1957년 12월 현대건설에 상무로 입사하면서 일생 동안 현대그룹과 인연을 맺는다.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간경화증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도 있었지만 1964년 ‘단양시멘트 공장’ 초대 공장장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한국 최초의 해외건설공사인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는 성과를 올렸다.
○ 포니 신화를 만들다
1967년 태국에서 얻은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국한 고인에게 정주영 명예회장은 “자동차를 맡아 달라”고 했다.
이해 12월 현대차가 설립됐고 정세영 명예회장은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그의 삶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이듬해인 1968년 현대차는 미국 포드자동차와 조립계약을 하고 1호차인 ‘코티나’를 선보였다. 기술 축적 기간이었다.
그러나 조립 생산에는 한계가 있었고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체 모델 개발이 반드시 필요했다.
1974년 10월 드디어 국산 승용차가 탄생했다. 첫 국산 고유모델 승용차 ‘포니’였다. 아직 중진국 대열에도 합류하지 못했던 한국이 ‘포니’를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하자 세계가 놀랐다. 이후 그는 국제 자동차업계에서 ‘포니 정’으로 통했다.
포니는 1976년 1월 생산을 시작해 같은 해 7월 에콰도르에 처음으로 수출되면서 신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혼신을 바친 그의 노력으로 1976년 20여 개국에 불과했던 수출 대상국은 2년 뒤 2배(42개국)로 늘었고 수출 규모도 1019대에서 3년 뒤인 1979년에는 1만9204대로 급증했다.
○ ‘현다이’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대차는 시련을 맞는다
‘2차 오일쇼크’로 국내에서뿐 아니라 수출이 급격히 줄었다. 더구나 당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중화학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자동차 산업 포기를 종용하는 일도 겪었다.
이때의 위기를 넘긴 정세영 명예회장은 이후 신형 모델인 ‘포니Ⅱ’(1981년)와 2번째 고유모델인 ‘스텔라’(1983년)를 잇달아 선보였다.
198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현지 판매법인을 설립했으며 이듬해 본격 수출을 시작해 한 해 동안 18만6000대를 팔아 포천지가 선정한 미국 10대 상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7년 현대그룹 회장과 현대차 회장에 취임해 현대그룹을 지휘하면서 자동차, 중공업, 전자, 건설 등 기간산업을 주력업종으로 육성했다. 1991년에는 국내 최초로 독자 엔진과 구동장치를 개발해 ‘자동차 기술 독립’을 선언했다. 북미, 중동, 유럽은 물론 러시아 등 공산권 시장에도 진출해 현대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웠다.
○ 자동차를 떠나 역사가 되다
1999년 3월 정주영 명예회장은 정세영 명예회장을 서울 종로구 계동사옥 집무실로 불러 “몽구(夢九)에게 자동차 회사를 넘겨주라”고 지시한다.
평생 형의 명을 거역해 본 적이 없던 그는 그 자리에서도 “예”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분신이었던 현대차를 조카에게 넘겨준 대신 그는 현대산업개발을 넘겨받았다. 이후 경영은 아들 몽규(夢奎) 씨에게 맡기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정세영회장 별세]현대家 1세대 경영 사실상 막내려 《정세영(鄭世永)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영(永)’자 항렬의 현대그룹 창업 1세대 가운데 절반이 세상을 떠났다. 생존해 있는 1세대들도 막내인 정상영(鄭相永) KCC 명예회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그동안 계열사별로 경영권 승계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옛 현대그룹은 이미 ‘몽(夢)’자 ‘선(宣)’자 항렬의 2, 3세 후계구도가 구축됐다.》
● 현대그룹 창업 1세대는 어디로
옛 현대그룹을 창업한 고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은 6남2녀의 장남으로 여동생 한 명은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다. 형제 가운데는 5남인 신영(信永) 씨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해 유명을 달리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신영 씨의 유복자인 몽혁(夢爀) 씨에게 현대정유와 현대석유화학을 맡겼으며 몽혁 씨는 현재 에이치에비뉴앤컴퍼니 회장을 맡고 있다.
바로 밑 동생인 정인영(鄭仁永)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1953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형과 함께 현대그룹을 키우다가 1977년 한라의 전신인 현대양행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1997년 말 외환위기로 극심한 자금난에 몰렸을 때 현대그룹의 자금지원을 받지 못해 형제간 갈등의 골이 깊었음을 보여 줬다.
막내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2003년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지키겠다’며 조카며느리인 현정은(玄貞恩) 현대그룹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다.
‘상중(喪中)에 조카의 그룹을 빼앗으려 한다’는 비난 여론이 일고, 금융당국으로부터 5% 공시의무 위반 판정을 받았으나 이후 정 씨 일가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는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 2, 3세 후계 체제 구축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남인 몽필(夢弼) 씨가 1982년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정몽구 회장이 사실상 현대 가문의 정통성을 잇는 장자 역할을 맡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올해 초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鄭義宣) 씨가 기아자동차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오너 3세 체제를 확고히 다졌다. 최근에는 맏딸 성이(聖伊) 씨가 현대·기아차의 광고를 전담할 ‘이노션’의 최대 주주로 나서기도 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3남인 정몽근(鄭夢根) 현대백화점 회장도 작년 말 아들들에게 지분을 넘기면서 장남인 정지선(鄭志宣) 부회장이 실질적인 경영을 맡고 있다.
현정은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은 맏딸 지이(志伊) 씨가 현대상선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작년에 정몽진(鄭夢進) KCC 회장을 비롯한 세 아들에게 주식을 넘기면서 경영권 상속 작업을 마무리했다.
정몽준(鄭夢準) 의원은 현대중공업 지분 10.8%를 갖고 있지만 아직 자녀들이 어려 후계구도 논의는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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