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김영식구본능하늘 2015. 10. 9. 06:42

생애

출생과 유년기

1897년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윤치소이범숙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조선 선조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였고,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은 당대의 고관이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윤치영이 태어났는데,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집안은 부유하였고 선대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스스로 회고하였다.  그의 조부 윤영렬은 삼도 토포사를 지낸 고관으로, 윤영렬이 삼남 토포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일가는 충남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유아기 때 조부가 토포사로 직인을 찍거나 먹찰 하는 것, 집안에서 사무를 보며 죄수들과 병사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기억하였다.  그뒤 집안에서 선생을 두고 한문을 익혔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틈틈히 그들 형제를 불러 충과 효를 강조하고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이때 그는 유비의 의로움과 관운장의 전공치적과 그의 충의에 감동받았다 한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그의 고조부 대에 약주가 과하여 가세를 기울게 하였다 하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훈계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 때문에 윤보선은 여행지에서나 정계 입문한 뒤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7,8세 때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한국이 일본에 진 국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나 조선 조정의 재정이 딸리므로 국민의 헌금을 바란다는 것이 보도된 이후, 국민 전체가 그 헌금을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들었다. 어린 그는 헌금운동에 참여하고자 점심을 절식하고 그 값을 돈으로 타낼 작정을 하였다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염려케 하였다. 10세 때 집 근처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1910년 4년 과정의 교동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충무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설립하 일출(日出)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한일합방 후 귀국해서 1년간 경성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이고 철학박사라는 점에 이끌려 그를 존경하기도 했으나  1950년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그와 갈라서게 되었다

 

학창시절

일출소학교에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그뒤 윤보선은 일본으로 유학, 도쿄(東京)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2학기를 배우고 그만두었다. 1913년 일본 정칙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 게이오의숙 의학부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기도 하다가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집에서 월 25원의 학비를 부쳐오므로 학업에 곤란은 없었으나 당시 그의 관심사는 중국의 신해혁명에 쏠려, 학업에 정진하기 힘들어서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신해혁명 관련 기사를 찾아서 읽곤 했다.

 청년기

 임시정부 활동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따라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 가고자 희망할 때 중국에 있던 여운형이 귀국하였다. 그는 청년회관을 통해 여운형의 소재지를 파악, 그가 머무르고 있던 한성은행 사무원의 집을 찾아가 중국으로 갈 의향을 밝혔다. 그의 뜻을 들은 여운형은 윤보선의 망명을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혁명을 하러 상해로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 윤치소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신학을 한다는 핑계를 댔다. 아버지 윤치소의 친구들 중에는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목사가 된 이들이 있었고, 그는 아들이 같은 과정으로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여권을 얻기 위해 상해를 경유해 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아들의 출국을 허락해 주었다. 이후 윤보선은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 도착 후 며칠뒤 항주에 요양중인 신규식을 찾아 갔다. 이후 신석우, 박찬익, 이시영, 이동녕 등 임정 요인들을 찾아뵙고 다시 이들의 소개로 중국혁명의 중진들을 소개받았다.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쓸 자금을 모금해오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받고  일본을 거쳐서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 중국 법무장관 서겸(徐謙)이 주일 중국대사 앞으로 쓴 소개장을 받고 중국인 유학생을 가장하여, 일본 경찰들을 피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 갔다.  국내에 잠입후 신분노출을 우려해 재일본 중국 기독교 청년회 간부 집에 은신하며 동생 윤완선과 접촉, 윤완선을 고국에 보내 자금을 조달해 오도록 하였다. 윤완선은 집안의 사재 3천원의 자금을 마련해 왔고 윤보선은 이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비밀리에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활동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경에 있을 때 백관수, 유억겸, 김준변, 김도연 등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최연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었다. 연령 미달로 의정원 의원 피선거자 자격이 없었으나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승인으로 20대 초반에 의정원 의원이 될수 있었다.[16] 장래를 위해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신규식, 이시영, 신익희 등의 충고로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 유학 생활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1] 1921년 6월 경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행권을 소지하고, 중국인 유학생들 틈에 끼어서 프랑스 배로 출항하였다. 이때 선상에서 임정 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한인들의 승선을 눈치챈 일본 관헌들이 호출해 중국언어로 대화하라고 시켰고. 윤보선은 간단한 단어로 대답하여 중국인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이동휘의 정체가 탄로나 하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중국 학생을 가장하고 3등 선실에 숨어서 42일만에 마르세유에서 하선, 프랑스로 가는 열차를 탑승했다. 이후 정기 여객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는 의학공부 중인 그의 당숙 윤치왕이 와 있었다.영국에 도착하여 화물을 취급하는 하물표를 발급받으려다가 거절당하고, 당숙 윤치왕을 만나 영국에 도착했다.

글래스고의 스캘리쉬 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버밍엄으로 건너가 퀘이커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후 다시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 3개월간 수학하다가 다시 에든버러 대학교로 옮겼다 이후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로는 인간으로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것은 정치학이나 신학 보다는 순수과학일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재학 중 정신적 스트레스와 과로로 신경쇠약에 걸려 2년간 병중에 있었다. 의사는 절대휴양을 위해 귀국을 처방하였으나, 학업을 마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으로 귀국권유를 사양했다.이후 병으로 2년간 휴학하였다. 병으로 2년간 휴학한 기간을 합쳐 6년만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에든버러 대학 졸업 이후에도 에든버러를 근거지로 하여 구주를 순방하였다. 대학재학 중 3년간 한반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수학하였으나 일본인 학생들의 접근을 피하고 멀리하였다.

 졸업과 귀국, 은둔생활

졸업후 독립운동의 장소로 미국과 중국 상하이를 고민하던 중 졸업했으니 집에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집에는 졸업사실을 전하지 않았으나, 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에 2년간 머물렀던 장덕수가 아버지 윤치소에게 졸업사실을 전했던 것이다.귀국후 왜경으로부터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집에서는 여비를 보내며 귀국을 독촉하였고, 그는 귀국 대신 구주 여행을 떠났다. 두번째 여비를 발송했을 때도 유럽여행을 하다가 세번째 여비와 함께 '부자지정을 생각해 다시 여비를 보내나 다음에는 보내지 않는다'는 최후통첩을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유학 6년 만인 1932년 귀국하였다. 부산역에 도착한 후, 안내원의 소개로 여관을 잡게 되었으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은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안내원의 집안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묵게 되었다. 당일 서울로 도착전보를 보내자, 아버지 윤치소와 어머니 이범숙, 딸 완구(玩求), 완희(玩姬) 등이 부산까지 내려왔다.

귀국 이후 그는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일경의 심한 감시를 받았고, 안국동 집밖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요시찰인물로 분류된 그는 일본경찰이 찾아와 그의 동향을 살펴보고 질문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한시간, 두시간, 일본경찰이 자리를 뜰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일본인형사는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였다. 한동안 몇몇 신뢰 가능한 지인들을 통해 이승만의 은신처로 방문, 이승만을 간간히 만나곤 했다 한다.

1943년 2월 폐렴(肺炎)을 앓았다. 부친상 직전 아버지가 있는 사랑방이 추운가 하는 걱정으로 야밤에 일어나 부엌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오한을 느낀 것이 그대로 폐렴으로 발전하였다. 부친상 5일상을 탈상한 후 폐렴의 위기를 넘겼으나 그는 흡연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에는 엽권연을 입에 물고 있다시피 할 정도로 애연가였다. 그러나 폐렴을 계기로 담배를 꼭 피워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뒤 담배를 꼭 피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자 그는 금연을 하였다. 태평양 전쟁 후반 그는 집안에 침거하면서 함경남도 안변군 사기리에 있는 문중의 별장을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정치 활동

 정계 입문

8·15 해방이 되자 윤보선은 숙부 윤치영이나 부친 윤치소와는 달리 친일경력도 없고 영어에 능통한데다가 막강한 집안 배경으로 정치에 투신하기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1945년 9월 6일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윤보선은 집과 기타 비용을 제공했고, 한민당의 회합은 윤보선의 집에서 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회합장소였던 그의 안국동 사저는 안동궁(安東宮)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45년 10월 미군의 한반도 상륙 뒤에는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직을 지냈다.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 피살 소식을 듣고, 새벽 6시경 제일 먼저 송진우의 원서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1946년 민중일보사 사장을 맡았고, 미군정청에서 임명한 경기도지사 고문직에 피선되었다.1947년에는 우남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서정주 등과 함께 이승만 일대기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정부수립과 제헌의원 낙선

1948년 5월 10일 5·10총선거 때 고향인 아산시에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5월 30일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의 비서관이 되어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되었으나, 7월 사퇴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주중국 대사 권유를 받자 가정 사정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기붕을 통해 다시 일본대사직을 요청했고, 일본대사직 요청은 불응하였다. 세번째로 상공장관 임영신을 통해 미국 대사직을 권하며 국무회의에서 이미 결의되었다고 하였으나, 민중일보를 통해 할일이 많다며 거절하였다.

서울시장 재임

그뒤 서울 시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2대 서울 시장을 지낼 때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 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등의 시책을 벌였다.[32] [33] 허정이 각의에 의해 서울시장 임명을 전해오자, 그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피하려 했으나 신문을 보고 서울시장 발령소식을 접하였다. 윤보선은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 삼촌 윤치영과의 관계를 고려, 시장직을 피하려 하였으나 숙질간일지라도 공과 사는 구별되는 것이니 구애받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서울시장으로 부임하였다.

서울시장 재직 중 공덕귀(孔德貴)와 재혼하게 되었다. 어머니 윤명사(尹明師)덕수교회 목사 최거덕(崔巨德)에게 아들의 혼사를 부탁하자, 최거덕 목사는 다시 한국신학대학장 송창근(宋昌根)을 통해 공덕귀와 중매를 섰다. 안동교회윤치소 등이 주도로 설립한 교회였다. 공덕귀호주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의 만류로 중단하고, 윤보선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혼수는 최목사 사저에서 마련했고, 결혼식은 1949년 1월 6일 윤보선의 안국동 집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하에 간소하게 했다.

 각료 사퇴와 야당화

1949년에는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고밝혔으며,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상공부 장관 재직 중 두 가지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다. 고무조합 배정사건과 경전사장 이태환 경질문제였다. 그 동안 외자청을 거쳐 상공부로 와서 고무조합에 배정되어 오던 생고무를 금융조합 연합회가 이승만 대통령을 움직여 상공부장관 재가 없이 임의로 처리했고, 그 명분은 짚신을 신는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신기겠다는 명분으로 처리되었다.

경전사장으로 있던 이태환을 미워한 이승만은 그를 해임하려 하였으나, 윤보선이 볼때 해임이유가 없어서 취체역 회장으로 전임시켰다. 이에 이승만이 진노하여 그후 책상에는 윤보선은 내말을 안듣는 사람이라고 메모를 해 두었다 한다. 또한 이승만이 한민당계 정당을 멀리하고 배척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이승만의 독단으로 국무회의가 공전하자 흥미를 잃어오던 그는 1950년 5월 상공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50년 5월 9일 상공부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에 선출되었다. 1952년 국민방위군 아사 사건 때 이승만이 사건을 비판하는 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면서 이를 비판하다가 이승만과 결별했다.

1950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정위원,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선출된 뒤 1951년 상이군인신생회의 회장으로 초빙되었다. 1952년 한정협회(韓丁協會) 회장 등을 지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재야정치인이 되었다. 1954년 5월 10일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종로갑구 후보자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제3대 민의원이 되었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된 후 민주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을 거쳐 1958년 민주당 후보로 제4대 민의원(종로갑) 후보에 출마하여 제4대 민의원으로 활동했고, 1959년 조병옥,장면, 곽상훈 등과 함께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1954년에 제3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제4대, 제5대, 제6대 국회에도 진출하였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신익희, 조병옥이 연속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일약 민주당 구파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별로 야심이 없었으므로 민주당의 당내 주도권을 쥐려던 신파들의 견제를 받지 않은 것도, 그가 구파로서 최고위직에 오르게 된 원인이었다.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

1960년 곽상훈 등과 함께 김구선생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 직접 커튼을 벗겼다.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던 조병옥이 사망하자 민주당 구파의 대부였던 유진산의 추천으로 조병옥(趙炳玉) 사후 구파 리더로 추대되었다. 윤보선은 당시 민주당 구파의 얼굴마담격으로 등장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제3차 개헌을 통해 의원내각제(양원제)를 채택하였다.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08표를 얻은 윤보선은 29표를 얻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제2공화국

민주당 구파에서는 대통령에 윤보선을, 국무총리김도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구파의 당론에 따라 국무총리로 구파 출신 김도연을 지목했으나, 민주당 신파의 반발로 장면으로 교체한다. 8월 16일 윤보선은 구파의 집권계획을 따라, 구파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목하였다. 17일 인준 투표에서 김도연은 의원재석 224명 중 찬성 111표, 반대 112표, 무효 1표로 부결되었다. 18일 윤보선은 2차로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였다. 16일 표결에서 재석 225명 중 찬성 117표, 반대 107표, 무효 1표로 겨우 인준되었다.  8월 26일 경무대에서 장면 국무총리 등 3부 요인들로부터 제63회 탄신일 축하 인사를 받았다.

내각출범 20일 뒤, 국무총리 장면은 개각을 단행하여 5명의 장관직을 구파로 교체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내각책임제에 개입할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나, 내각인사에 개입 구파에게 준 자리는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1960년 8월 29일 이른 아침, 휴가 겸 민정시찰을 나갔다. 비서실을 통해 전갈을 전달하자 총리 장면을 비롯한 각료들이 서울역에 집결하였다. 관 1호차를 탄 윤보선 부부는 서울역에 도착, 8시에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역을 출발하여  전국을 순회했다. 이 일이 정치권에 알려지자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 나오라고 지시한 것은 무엇이며, 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장면은 뭐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는 윤보선은 대통령직에서 월권을 한 것이고, 장면은 자기 밥그릇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이었다.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를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직접 이름을 개칭하기도 하였다.

10월 10일 장면 국무총리허정 과도수반 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경질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구파 입장을 대변하는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장면 내각에서 정치에 왜 관여하느냐며 비판하자, 윤보선은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

그동안 윤보선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난한 인물로 비춰졌기 때문에 신파도 대통령직에는 윤보선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였다.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장면 내각의 정책과 반대되거나 장면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는 했다. 장면은 청와대를 갖은 정략을 꾸미는 구파들의 참모본부로 여겼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그는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 현상을 겪고 있을 때 당시 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정부에 다소 부담을 주었다. 나아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를 방조했다는 논란도 있다.

1961년 1월 12일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 참석하여 신년치사를 하였다. 그런데 윤보선은 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한 개인, 한 당파가 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 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장면 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 장면 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하였다.

2월 27일 국토건설단 창단식에 국무총리 장면과 함께 참석하였다. 1961년 3월 윤보선은 장면에게 거국내각 구성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3월 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을 하였다. 3월 23일 대통령 윤보선은 장면에게 사퇴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나의 총리직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책이므로 사퇴할수 없다고 받아쳤다.

4월 19일 4·19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야당 활동과 민주화 투쟁

 군정기간 중

5·16 군사정변 후 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거절했다. 1961년 5월 19일 햐야선언을 하였으나 5월 20일 번복하였다. 5·16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부에서 대통령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 사퇴성명을 번복했다.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박정희의 구정치인 활동금지법에 반발했다는 주장도 있다.[출처 필요] 퇴임후에는 안국동 사저에 칩거하였다.

1962년 6월 29일 반공유격전적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윤보선과 허정은 각각 측근들을 데리고 산책데모를 하였다.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초대로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함께 박정희와 면담하였다. 김희덕(金熙德)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

'3.16 성명이 박의장의 깊은 사려에서 나온 줄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세상 만사가 그렇게 박의장이 제안한 것처럼 척척 될는지도 의문이고 또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식은 바로 이승만 박사의 사고방식과 같다. 인간 개조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20년이고 30년이고 점진적으로 이룩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이어 군인사명은 국방에 있으니 만큼 군인들은 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윤보선의 말을 듣던 박정희는 노하며 오죽 당신네들의 과오를 못 참았으면 군인들이 일선에서 돌아 왔겠느냐 며 응수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장택상이 화제를 돌려 논쟁을 막았다.

 대선 출마와 낙선

1963년 민주당 구파 세력을 규합하여 5·16군사정변 세력이 참여한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63년 7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후보는 허정과 김도연의 2파전으로 압축되었지만 사전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김도연이 포기를 선언해 후보경쟁은 다시 윤보선과 허정의 대결로 전환되었다.

그뒤 최종 지명되어 출마, 유세 도중 박정희공산주의 활동을 지적, 비판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1월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65년 5월 박정희정권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위해 자신이 만든 민정당을 민주당과 통합하고,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고문에 선출됐다. 이후 장택상,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굴욕외교 반대 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1965년 6월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즉시 무기한 단식투쟁을 감행하다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9월 장택상, 함석헌, 이범석, 장준하, 박순천 등과 함께 서울 용산효창공원에서 열린 한일협상 반대집회에 참석하였다.

1966년 3월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범 야당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중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한 후 신민당 공천으로 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6대 대선 유세기간 중 야당의 후보였던 그는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보자'며 여당 후보 박정희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이때에도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의혹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고 윤보선에게 유리해 보였으나 그해 2월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근소한 표차이로 패하여 낙선했다. 윤보선의 지지 지역은 수도권과 도심지역이었고, 박정희의 지지 지역은 농촌과 산촌 지역으로 나타났다.

 유신 이후 야당 지도자

윤보선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정권 치하에서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출석교회였던 안동교회(예장통합측의 장로교회. 안국동 소재)는 형사들의 감시대상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하고 총재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72년 강제 해산당했다. 1973년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서 인혁당사건 관련 사형 집행자 추모예배가 문제되어 목요기도회는 중단되고 문동환, 이해동, 김상근 목사 등이 연행되었다. 모임 참가자들은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강요에 동아일보에 목요기도회를 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그들에게 회의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 주었다.  73년 3월 23일 윤보선은 정구영, 지학순 주교 등 10명과 함께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약칭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윤보선은 비상군법회의로부터 민청학련사건 관련혐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당하였다. 1974년 11월 27일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을 선언하고, 함께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배후 지원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3월 8일, 동아일보의 대량 기자해고 사태가 발생하자 3월 14일 동아일보 사태를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 이어 같은날 3월 14일 단독으로 '3ㆍ1정신으로 구국대열에 서자 -3천 5백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70년대 후반

1976년 3월 1일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3·1 명동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문익환, 함세운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700여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폐지 등을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가 가택수사를 당하였고, 뒤이어 '사실 왜곡 전파', '헌법 왜곡 비방 및 폐지 선동' 등의 혐의로 최고 징역·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그뒤 형량은 징역 8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1977년 3월 22일 3.1사건의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윤보선은 지학순 주교 등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1977년,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일본 후쿠다 수상에게 박정희 유신정권과 유착한 일본 정부를 비판하면서, 일본이 대한 정책을 시정할 것을 촉구하는 긴 글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오랫동안 윤보선의 서신발송을 묵살하던 한국 언론은 뒤늦게 편지의 내용을 입수,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윤보선이 일본에 내정간섭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보도, 이때문에 곤욕을 치뤘다.

1977년 강희남, 문익환 목사 등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인사들을 면회하러 공덕귀, 양일동, 이희호 등을 대동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갔다가 거절당하고 되돌아왔다. 1977년 9월 광주 고법의 강희남 목사 첫 공판일에 방청객으로 참관하였으나, 재판을 연기하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9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과 공동으로 '국민에게 드리는 글(청계피복지부 노동조합 탄압에 붙여)'를 발표하였다.

1977년 12월 성명서 '학생탄압을 중지하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최근 학원 사태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를 발표하다. 1978년 1월 6일 재야인사들과 곧동으로 옥중에 수감중인 민주인사를 위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

1978년 12월 7일 민주주의 국민연합과 함께 성명서 '12ㆍ12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다.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국민연합이 체제를 개편하여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의 개편되었을 때 윤보선은 함석헌, 김대중과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3월 4일 안국동 사저에서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였고, 3. 1절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9년 YWCA위장결혼사건으로 피체, 후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79년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이 됐다. 이후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을 지내다가 정계에서 은퇴했다. 10월 26일 박정희의 피격소식을 접하였다.

 생애 후반

 최규하 정부 시절

1979년 10·26 사태로 현직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피살되자 그는 인과응보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이후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정권교체를 예상하고 야당 후보의 단일화를 김영삼, 김대중에게 요구하였으나 결렬되었다.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는 서신을 보내 유신 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인 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함석헌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집행유예가 내려지고 곧 감형되었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이 전직 3부 요인과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할 때, 국정자문회의 의원에 위촉되었고, 바로 국정자문회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2월 28일 최규하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윤보선, 김대중등 687명에 대한 복권조치가 단행되어, 복권되었다. 9월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제5공화국 협력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시절과는 달리 정부에 적극협력하여 국정자문회의등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줄곧 국정자문회의 의원을 지냈다. 이후 줄곧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야당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81년 4월 23일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5년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직을 지냈다. 1985년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와 미국 국제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를 지지하기도 했다.

 사망

그후 건강이 악화되어 1989년 5월 14일 지병인 당뇨고혈압폐렴까지 겹쳐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 안정을 되찾아 자택에 요양했으나 급성 신부전증으로 다시 입원했고 1990년 7월 18일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9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진행되었으며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에 위치한 가족묘에 5대조·부모묘 근처에 안장되었다.상훈으로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그의 사후에도 1997년까지 부인 공덕귀가 살던 그의 안국동 사저는 서울특별시 사적 제438호로 지정되었다.

 학위

 기타 약력

 기타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의 자택은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이다. [1] 3.1 구국 선언, 민주화 운동 단체 가입, 크리스찬아카데미, 인혁당 사건,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지원하거나 연루되어 때문에, 그가 출석하던 안동교회중앙정보부와 형사들의 감시, 사찰대상이 되었다. 안동교회는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설립, 헌당에 참여한 교회였다.

 인물평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77] 1960년 8월 29일 민정시찰 시 각료들을 불렀다가 월권행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에 대한 의혹

군사정변 당시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각책임제 치하에서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 한다.

후에 유원식이 5·16 군사정변 직전에 대통령 윤보선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 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78][79]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은 1962년 5월 유원식이 제기하였다. 유원식은 인터뷰에서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80]

국가원수 신분으로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 중이었던 윤보선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윤보선 측은 5·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여, 유원식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도연으로부터 폭동발생, 정변 음모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연에게서 들은 정보를 국무총리 장면에게 알려 철저한 대응을 지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반응했다고 한다.

 일화

1961년 1월 1일 신정한국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세배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세배를 받은 후 윤보선은 우표 두장을 가져와 도완을 문제삼았다. 소가 도완된 우표는 61년은 신축년으로 소의 해였고, 색실로 꽃버선이 도완된 우표를 들고 와, 소(丑)을 내세워 윤씨인 자신을 모독하고 버선을 인쇄해 보선이라는 이름을 놀리는 저의가 어디 있느냐며 항의하였다. 선우종원우표 샘플을 올리는 방법과 절차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1961년 자신의 비서관 김남의 동생 김상협의 결혼식이 있었다. 김상협조폐공사 직원이기도 했는데,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으로부터 결혼식 참석 부탁을 받자 그는 '국무총리 참석하나요'라고 되물었다. 온다는 답변을 받자 그는 나는 안가겠소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선우종원은 저와 한직장에 근무하는 데다가 인촌선생의 아들의 혼사인데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며 항의하여 가까스로 달래자 참석하였다.

 가족

그의 둘째딸은 독립운동가 신규식의 장남과 결혼하여 신규식과는 사돈간이 된다.

 주요 저서

  • 주요저서 《구국(救國)의 가시밭길》 (한국정경사, 1967)
  •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동아일보사, 1990)

 윤보선을 연기한 배우들

 참고자료

 외부 링크

              관련 서적

  •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동아일보사, 1991)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한국정경사, 1967)
  • 심지연, 《장면, 윤보선, 박정희(1960년대 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백산서당, 2001)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유행어

  •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올것이 왔다.라는 말을 하여 유행시켰다.
  • 대한민국 5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88] 이후 정신적 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되었다.

     함께 보기

전 임
김형민
제2대 서울 시장
1948년 12월 15일 ~ 1949년 6월 5일
후 임
이기붕
전 임
임영신
제2대 상공부장관
1949년 6월 6일 ~ 1950년 5월 9일
후 임
김훈
전 임
(종로구 갑)박순천
(종로구 을)오하영
제3대 국회의원(종로구 갑)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민주국민당
(종로구 을: 김두한)
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한근조
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김두한
제4대 민의원(종로구 갑)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민주당
(종로구 을: 한근조)
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한근조
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한근조
제5대 민의원(종로구 갑)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민주당
(종로구 을: 한근조)
후 임
(종로구)전진한
전 임
김병로, 박순천
제8대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대표
1965년 5월 11일 - 1965년 5월 30일
후 임
박순천, 윤보선
전 임
윤보선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대표
1965년 5월 30일 - 1967년 2월 11일
후 임
유진오
전 임
유진산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대표
1971년 10월 16일 - 1972년 10월
후 임
유진산
국정자문회의 의장
1980년 2월 18일 - 1980년 9월
후 임
최규하
제1대 민족사바로찾기 국민회의 의장
1979년 - 1986년
후 임
윤보선
전 임
윤보선
제2대 민족사바로찾기 국민회의 의장
1986년 - 1990년
후 임
최규하

출처 : 박재홍
글쓴이 : 제레드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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