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장옥정 조선 숙종의 사랑의 여인 장희빈 사약받고 죽음

김영식구본능하늘 2015. 9. 30. 22:17

장희빈(장옥정)은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살다 갔을까?

 

 

 

드라마나 책을 보면 장희빈과 인현왕후, 숙종 등을 그릴 때 대부분 장희빈 만 나쁜 인간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중인 출신으로 왕비가 되고 또 사형을 당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을 단순히 나븐 사람으로 그리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장희빈의 실제 이름은 장옥정이다.

실록에 후궁이나 왕비 중에서 유일하게 '자못 아름다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연산군 어머니인 폐비 윤씨에 이어 후궁에서 왕비가 된 두 번째 인물이기도 하다

 

숙종실로을 보면,

장희빈은 효종 10(1659)에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현종 10년 아버지 장경(張烱)을 여의고 숙부 장현의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의 집 종이었던 관계로 조대비의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조대비의 조카사위인 숭선군, 그 아들인 동평군 집안과 가까웠다.

장희빈이 살았던 시기는 북벌론을 주도하던 효종이 승하하면서, 12차 예송(禮訟)이 벌어지고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이 벌어지는 붕당정치의 격동기였다. 이러한 격동기에 장희빈은 현종 15 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는 시기에 궁중에 들어가 2살 어린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궁 밖으로 쫓겨났다가, 숙종 9년 모후 명성왕후가 승하하면서 다시 궁으로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숙종 14 10 28일 왕자를 낳고 다음 해 1 11일에 그 아들이 원자로 정해졌다. 곧이어 5 2일 인현왕후를 내쫓고 5 13일왕비가 되었다. 숙종 16 6 16일에는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 숙종 15 2 2일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2 4일 제주도로 유배가고 6 8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5년만인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다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장희빈은 세자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무고죄를 받아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장희빈은 효종 10년에 태어나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이 종법을 둘러싸고 예송으로 이념논쟁을 벌이던 현종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양반호포제노비종모법  대동법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보수와 개혁의 대결을 벌이던 숙종대에, 남인 세력과 연결된 숙종 후궁으로 등장하여, 뒤에 경종이 되는 아들을 낳아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노비제도는 서인이 집권하던 현종 10년에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라도 그 자식은 양인이 되는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현종 15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이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식은 양인이 되었다가,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을 앞세워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은 다시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정책을 쓰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니 장길산 같은 도적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을 바로 잡기 위해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여 노비종모종량법을 다시 제정하는 등 개혁을 서두르니, 장길산 같은 도적은 저절로 사라지고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모든 제도의 정비가 추진된다. 이처럼 성리학 이념에 따라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첩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아들 못 낳은 적처를 내쫓고 적처가 되어 집안을 차지하려는 것은 성리학 이념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기에, 장희빈은 숙종 27년 이러한 성리학 이념에 어긋났던 보수세력을 대표해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이와 같이 현종, 숙종대 정치사를 일괄해 볼 때, 서인과 남인이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 대결을 하는 과정에서 장희빈은 삼강의 하나인 부위부강(夫爲婦綱)에 어긋나는 숙종의 행동을 지지했던 남인의 지지를 받았고 이를 반대했던 서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희대의 요부로 묘사되거나 정치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거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대결을 하는 붕당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장옥정에 대해서 살펴 보면,

 

장희빈의 아버지는 중인 집안의 장형(장경, 1623~1669)이다.

장희빈의 어머니는 조사석의 처갓집 여종으로 장형의 계실로 들어갔다.

장희빈 형제는 2 2녀지만 본처에서 1 1녀 계실로 들인 장희빈 어머니 윤씨가 1 1녀를 낳은 것 같다.

장희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조선의 갑부인 큰아버지 장현이 장희빈 모녀를 돌봐주었으며, 장희빈을 아껴 천민을 면하게 해준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장옥정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인조의 계비이자 장렬왕후 조씨는 15세에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린 인물이고 남인출신이다.

장렬왕후 이후에 효종과 현종의 비는 모두 서인출신이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성격이 매우 급하고 감정기복이 심했다..

 

명성왕후는 남인을 미워했고 또한 장옥정도 미워했다.

그래서 구실을 달아 명성왕후가 장옥정을 궁밖에 내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장렬왕후는 내쳐진 장옥정을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궁(이징)의 부인을 시켜 장옥정을 돌봐주게 한다.

그리고 이 때 인현왕후 민씨가 숙종의 왕비로 입궐한 후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 들인다.

이는 명성왕후가 죽고 장렬왕후가 숙종을 설득하고 인현왕후의 동의 하에 장옥정은 재입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장희빈은 22살에 입권했다가 쫓겨나고 28세에 재입궐한다.

게다가 숙종이 사랑하여 임신하지 않고선 후궁첩지를 받기 어려운데 임신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격적으로 숙원에 봉해졌다. 조정에선 반대했지만 숙종은 굽히지 않았고, 2년 뒤에 경종을 낳았다. 숙종이 28세 때이고 첫 아들이었다.

 

그리고 장희빈은 30살에 인현왕후를 내치고 왕비가 되었지만, 4년 만에 다시 후궁으로 내려 앉았다. 임금의 총애는 그만큼 짧았지만 궁에서의 권력이 대단해서 다시 돌아온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왕의 총애를 받고 권력도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후에 숙종의 자살 권유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경종은 매우 착한 사람이다. 친 어머니를 버리지 못하지만 인현왕후에게도 매우 효자였다.

실록에서 장희빈이 인현왕후가 아플때 한번도 찾아가 보지도 않고 신당을 차려서 자진하라고 나와있다.

그런데 장희빈은 경종이 매일 인현왕후에게 안부 인사를 하러 중궁전에 가지 말라고 경종을 때린다.

그럼에도 경종은 매일 중궁전을 찾아갔으며 인현왕후가 경종을 매우 아낀다고 나와 있다.

 

장옥정이 왕비가 된 것은 그녀의 지략과 숙종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아마 숙종의 다혈질인 성격이 한 몫을 했고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숙종은 장희빈에서 최숙빈으로 사랑을 옮기고 최숙빈을 아끼게 되어, 경종이 세자였을 때 영조로 세자를 바꾸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최숙빈이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인현왕후의 생일에 혼자 생일상을 차려 숙종의 눈을 띄어 승은을 입는다.

이일이 숙종이 인현왕후를 다시 불러 들이는 계기가 된다.

 

이 일은 장희빈이 숙종의 사랑을 받는 최숙빈을 매질하고 장독대에 숨겼다고 발각이 된 후, 서인과 최숙빈이 짜고 장희빈을 계속 모함하니 숙종은 결국 장희빈을 내치게 된다.

 

경종은 장희빈이 죽고 어머니를 복위하려고 했지만 조정에서 반대하여 실패하였고,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후궁으로 남게 되었다.

 

이리하여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악녀이자 요부로 남게 되었다.

 

출처 : 캠브리지 에듀케이션
글쓴이 : 캠브리지 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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