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조선의 상징 오얏나무
번동(樊洞)의 유래
서울 도봉구에 번동이란 동명이 있는데 여기에는 이런 유래가 전해진다.
고려 말 풍수도참설이 유행할 때 ‘이씨가 한양에 도읍을 할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고려 조정은 마침 이곳 번동일대에 오얏나무(자두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李)씨가 흥할 징조라고 여겨 오얏나무를 베어 없애버리는 벌리사(伐李使)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 이곳을 벌리(伐里)라고 하다가 한자이름으로 바뀌면서 번리(樊里)라고 부르다 번동(樊洞)이 되었다는 것이다.
<종묘 향대청 앞 뜰에 오얏나무에 꽃이 핀 모습입니다>
<나무잎은 배, 자두 보다 작고 꽃 모양은 비슷하나 작습니다>
오얏은 이(李)씨를 나타내며, 이씨의 왕조인 조선은 오얏으로 상징된다.
따라서 고려는 오얏나무를 베는 일이 조성왕조의 싹을 없애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종묘의 오얏나무
오얏나무의 꽃이 지고 있습니다.
흔히 자두가 오얏이라고 말 하지만 꼭 그렇치는 않습니다. 현재 우리가 접하는 자두는 개량종이고 오얏은 재래종 자두라고 한다면 정답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가 오얏나무를 볼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이씨조선은 도읍이었던 지금의 서울에는 조선의 흔적과 유적이 많습니다.
4대궁, 종묘, 사직단, 환구단 등이 있지만 오얏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은 종묘 향대청이 유일합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수년전 이씨조선의 상징인 오얏나무를 보급하기 위해 20여 그루를 심었다고 하는데 잘 자라는 자두나무와 달리 오얏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죽었는데 향대청 앞 오얏나무만이 살아서 현재 관람객들이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오얏열매입니다. 자두와 흡사한데 작습니다>
오얏나무 열매의 맛
오얏열매의 맛은 어떨까요?
문헌에 의하면 무척 신맛이 나서 입에 침이 돈다고합니다.
그러나 살구나 자두 모두 익기전에는 신맛과 떨은맛이 납니다.
물론 오얏열매도 익기전에는 신맛이 있지만 익은 열매는 향과 맛이 좋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백번을 들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한가한 휴일
가족들과 손에 손 잡고 종묘를 들려 이씨조선의 상징인 종묘의 오얏나무도 보시고 이씨조선의 왕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종묘로 오십시요~~~~
대한제국 때 사용한 오얏문양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 내내 오얏나무를 ‘왕씨의 나무’로서 특별히 대접한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는 오얏 꽃은 왕실을 대표하는 문장(紋章)으로 사용하였다.
1884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시작된 우정사업은 1905년 통신권이 일본에 빼앗길 때까지 54종의 보통우표를 발행하게 된다.
이 보통우표에는 이왕가(李王家---이왕가는 일본제국이 강제로 한일합방을 한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졌고 조선을 격하시켜 이씨왕가라는 왕통의 개념으로 유지했는데 당시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는 이완용의 덕으로 이왕가를 다스리는 수장을 맡은적이 있다.)의 문장인 오얏과 태극이 주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화우표(李花郵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 구한말 우표 등에 사용되었고, 지금은 전주 이씨 종친회 문양이다.
<창덕궁 인정전의 사진입니다.
용마루에 구리로 만든 이화문양을 5개 장식했습니다>
궁궐 편전의 문짝이 노란색과 청색의 차이---문화재 상식
창덕궁의 편전인 인정전의 문짝은 노란 금색이 칠해졌습니다.
그럼 궁궐의 문짝 색깔이 다 금색일까요?
그렇치는 않습니다.
경복궁과 창경궁, 경희궁 편전의 문짝은 청색이며 창덕궁과 덕수궁 편전의 문짝은 금색입니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으로 중국의 눈치를 봐야했습니다.
정치는 물론 궁궐의 색깔까지도 조선의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지들은 황제국이라해서 문짝에 금색을 칠했으며 주변의 속국들은 금색은 칠하지 못하게 했으며 대신 한 단계 아래로 생각하는 청색을 칠했습니다.
고종이 중국을 배제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고 우리도 이제 황제국이라며 문짝에 금색을 칠하게 되었는데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이 머물렀던 창덕궁과 덕수궁은 황제가 계신 곳이라서 금색을 칠했던 것입니다.
<창덕궁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으로 용마루에 이화문양 3개를 장식했습니다.>
이화문양을 장식한 궁궐---문화재 상식
위에서 논한바와 같이 이화문양은 이씨조선을 상징합니다.
그렇다고 궁궐마다 모두 편전 용마루나 편전 출입문에 이화문양을 장식하지는 않았습니다.
정궁이었던 경복궁이나 이궁이었던 덕수궁, 경희궁, 창경궁의 편전 어디에도 이화문양은 없습니다.
이화문양을 장식한 곳은 창덕궁의 편전과 편전 출입문이 유일합니다.
오얏나무는 중국이 고향이다.
《시경》왕풍(王風) ‘언덕위의 삼밭(丘中有麻篇)’에 나오며 《삼국지》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복숭아, 오얏, 살구, 밤, 대추를 다섯 가지 과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도리(桃李)하여 복숭아와 함께 백제 온조왕 3년(15)에 처음 등장한다. 이를 미루어 보아 적어도 2천 년 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과일나무다. 《훈몽자회》나 《동의보감》 등에 나오는 우리말은 ‘오얏’이었으나, 《도문대작》 등에는 ‘자도(紫桃)’라고도 하였다. 보랏빛이 강하고 복숭아를 닮았다는 뜻의 자도는 다시 자두로 변하여, 오늘날 오얏나무의 정식 이름 자두나무가 되었다.
《천자문》에는 ‘과진이내(果珍李奈)’라 하여 과일 중 보배는 자두와 능금이라고 했다.
맛이 좋다는 뜻이겠으나, 오늘날의 우리 미각으로 본다면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자두는 개량종으로 굉장히 맛이 좋아졌음에도 흔히 자두라고 하면 신맛을 상상하여 입 안에 군침부터 돈다.
옛사람들은 복숭아와 함께 봄에는 자두 꽃을 감상하면서 시 한 수 읊조리고, 과일나무로서 곁에 두고 좋아했다.
흔히 쓰는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자두나무 밑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이다.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만큼 자두나무는 사람들 가까이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위 글 중 반어체의 글과 이화문양의 우표, 도자기,고화 등은 퍼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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