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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 세계대전 1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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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1차대전(원인 경과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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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해설(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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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제1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 - Western Front (World War I) 西部戦線 (第一次世界大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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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의 발발동기
이는 시대적으로 슬라브족의 중심인 로마노프왕가 주창해온 범슬라브주의라는민족주의와
독일과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함스부르크왕가의 범 게르만주의가 충돌
영국프랑스 스페인등 브르봉왕조가 지역패권과 식민지 영토확장등에 혈안이 되어 있고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충돌)
프러시아(프로이센)를 주축으로 대독일제국을 건설한 빌헤름2세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유럽을 뒤흔들고 있을때
1914. 6.28일Austro-Hungarian Emperor Franz Josef (오스트리아-항거리안 황제 프란츠 조셉)
황태자 부처( Franz Ferdinand)가 세르비아(전 유고 현재세르비아)에 군대 열병식참가하는길에 Sarajevo에서 한 세르비아 청년에의해 권총으로 암살된 계기로 1차대전이 발발.
이 암살사건은 그저 명분에 불과하였고 이 이전부터 각국이 연대하여 블록을 형성하여 전쟁할 이유를 찾지못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라예보의 한발의 총성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1개월만에 선전포고 곧이어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 영국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 전 유럽이 3일만에 전쟁의 도가니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주요원인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충돌
3B 정책과3C정책의 충돌 해외식민지 쟁탈
범슬라브정책과 범게르만정책의 충돌(합수부르그 왕조(독일 오스트리아)와 로마노프왕조(러시아왕조)의 충돌
발칸반도의 슬라브화를 저지하기위한 전쟁 러시아 남진정책 저지
1.삼국협상
1891년 러·프 동맹
1904년 영·프 협상
1907년 영·러 협상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유럽·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제국주의 제국과 대립·충돌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교묘히 분리되었던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이 독일에 대하여 강한 경계심을 품고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독일을 고립화시키기 위하여, ,각각 체결되어 외교적·군사적 동맹체제를 정비했다.
삼국동맹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로 구성된 삼국동맹의 제국주의 국가끼리 대립이 시작되어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2.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제국주의 확장정책)
제국주의 확장정책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독일은 얼마후 제1차세계대전에서 각각 3국협상과 3국동맹의 일원으로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유럽의 강국이라 자부하는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 재정책의 결과입니다
영국은 전세계곳곳에 식민지를 경영했지만, 다소 늦은 근대화와 통일로 뒤처져있던 독일은 식민지 확보를 하려고 하면 영국이나 프랑스가 방해를 하게되어 영국 프랑스가 관심을 갖지않은 지역을 선택하게된것입니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이었으며 각각 카이로(Cairo)ㆍ 케이프타운(Capetown)ㆍ 캘커타(Calcutta)를 연결하여 아프리카와 인도양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 베를린(Berlin)ㆍ 비잔티움( Byzantium)ㆍ바그다드(Baghdad)를 연결(철도부설)하여 소아시아와 중동지방의 팽창 즉 근동지방확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바로 독일의 3B 정책입니다
이런 확장 정책은 다른 경쟁국들과의 마찰도 있었지만 ,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군비경쟁으로까지 확산 되었습니다
1차대전은 영국과 독일의 직접 대립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보면 합스부르그 왕가와 영국 프랑스의 부루봉 왕가의 대결이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의 남진정책이 물려 영국 독일은 다시 러시아를 저지하는데 협력하게되었으며 이런 밀월이 끝나자 세계대전의 시작이 바로 식민지 쟁탈전의 전초였습니다
3.범슬라브주의(Pan Slavism)와 범게르만주의의 충돌 (러시아 로마노프왕가중심) (독일 합수부르그 왕가중심)
러시아의 대외정책중 하나입니다 슬라브 민족권(언어 종교)이 단결하여 유럽세력에 맞선다는 정책특히 발칸 반더지역 슬라브 민족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슬라브 언어 사용국가들과 러시아 정교를 믿고있는 국가간 협력 결속하자는 러시아 정책
범 게르만니즘(Pan Germanism)(독일 합수부르그 왕가중심) 독일 오스트-항거리 중심으로 연합한 범슬라브주의에 대적하는 민족주의 바로이 두가지 상반된 주의 주장 정책이 1차대전의 불씨입니다
1. 주요일지
일 자 |
주 요 사 건 |
일 자 |
주 요 사 건 |
1914.6.28 |
프란츠 황태자부처 피살 |
1915.5.23 |
이태리 오스트-헝가리에 선전포고 |
1914.7.23 |
세르비아 흑수단 대표체포요구 |
1915. 9.11 |
영국군최초로 탱크 제작전투시작 |
1914.7.24 |
세르비아 러시아에 지원요청 |
1916.2.21 |
독일군 베르뎅 공격 |
1914.7.28 |
오스트헝가리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
1916.3.9 |
독일군 폴투칼에 선전 포고 |
1914.8.1 |
독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
1916.8.29 |
힌덴부르크 독일 참모총장 취임 |
1914.8.4 |
독일군 벨기에 점령 |
1917.4.6 |
미국독일에 선전포고 |
1914.8.4 |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
1917.6.29 |
그리스 독일에 선전포고 |
1914.8.12 |
오스트헝가리 세르비아 공격 |
1917.7.17 |
영국왕조지5세 윈즈로 개명 |
1914.8.26 |
탄넨베르그전투시작 |
1918.1.8 |
미국윌슨대통령 14개 평화조약 선언 |
1914.9.6 |
프랑스 마른 전투시작 |
1918.10.3 |
맥스베이든 독일 수상 임명 |
1914.10.29 |
터키 독일측연합군에 가담 |
1918.9.9 |
빌헤름2세황제 퇴위 |
1914.12.25 |
서부전선 크리스마스 휴전 |
1918.11.11 |
1차대전 종전 |
1915.4.22 |
독일군 개스전시작 |
1919.1.12 |
파리평화 협상 |
1915.5.7 |
루스티아나호 침몰 |
1919.6.28 |
베르사이유협정 조약 |
2. 1차 세계대전과 전쟁사에 미치는 영향
. 참호전이 가져다 주는 지구전 소모전의 비효율성
. 기관총의 등장으로 전술및 전투 개념의 새로운 정립
. 독개스 출현으로 인한 전쟁사에 화학전의 시초가 된점
3.후유증및 결과
끝내 독일을 중심으로한 함스브르그왕조가 멸망하고 독일은 유사이래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물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독일은 이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해댈능력이 없어 결국은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된 경우 입니다.
1차세계대전은 중세왕조들이 그들의 블록을 형성하여 몰락하는 왕조를 재 건설하는의미와 식민지 수탈정책에서 다른나라와 뒤질세라 각축장이 벌어졌고 이 왕조블록은 새로운 물결이 엄습해오는과학 기술등 산업혁명의 가속화와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전쟁이란 옛날 방식을 채택하여 유럽세계 발전에 100년이상 후퇴시키고 그 세계적 주도권을 미국에게 내놓은것이 되었습니다.
전쟁결과
1.전통유럽지배세력의 퇴조
2.해외 식민지의 독립또는 상실
3.전쟁보상비로 인하여 독일 국민 압박하여 애국심 고조
4.독일 애국심이 힛틀러의 등장을 합리화시켰음
5.독일 채무국에서 탈출할수있는 방법이 군비 증강 혁신
6.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입지가 축소
7.러시아 혁명의 기폭제
8.2차세계대전 가속화 요인
9.유럽왕조의 퇴조또는 몰락
10.독일제국 러시아제국 오토만제국 오스트헝가리제국 멸망
11.동유럽신생국가 건설
12.연합군: 영국 프랑스 이태리 러시아 미국
13.패전국: 독일 오스트 헝가리 불가리아 오토만제국
14.전사자:
구 분 |
연 합국 측 |
패 전국 측 |
합계 |
비 고 |
전사자 |
5,000,000명 |
4,000,000명 |
9,000,000명
|
전투병력민간인 포함
(미군:116,708명) |
.......................................................
1차 대전 발발 100주년 기념, 컬러로 보는 1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 매주 토요일 밤 10시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
아름다운 시절이었던 1900년대 초! 유럽은 그 어느 때보다 강성했고 미래는 더 좋을 것이라는 확신도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장 조레스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들의 폭력적이고 혼돈스러운 사회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그 안에 전쟁을 품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죽음의 기운이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대체 어떤 광기가 전 세계에 퍼졌던 것일까요?
4년 동안 전 세계의 촬영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긴박했던 전선의 중심을 촬영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에서 컬러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분노, 공포, 해방에 굶주렸던 <1차 세계대전>을 풀 컬러 이미지로 정리했습니다.
전쟁의 시작, 사라예보 암살 사건
사라예보가 세계의 운명을 영원히 바뀌게 되는 곳이 될 줄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곳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0년대 초반 합병한 보스니아의 도시입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 민족을 통합하려던 이 합병에 반대했죠.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가 권총에 맞아 암살 당했습니다. 범인은 19살의 보스니아 민족주의자, 그에게 권총을 제공한 건 세르비아 인들이었죠. 이 부부의 장례식과 함께 전쟁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오스트리아 참모총안은 이렇게 선언했죠. '우리는 세르비아 인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 제국을 영원히 뱀처럼 갉아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8월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출항했지만 황제는 분쟁이 번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준비가 안 된 러시아는 전쟁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고 동맹국 프랑스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일주일 안에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4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장병들이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천만 명의 사상자, 이천만 명의 부상자
8월 22일 하루에만 2만 7천 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이 날은 프랑스군 역사상 인명 피해가 가장 막대한 날로 기록되었습니다. 힌덴부르크가 이끈 독일군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지만 전우 만 명을 잃었습니다.
전쟁을 끝낼 유일한 방법
독일의 루덴도르프가 생각한 해결책은 단 하나, 독일이 최대한 빨리 승리해 영국을 무릎꿇게 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죠. '무제한 잠수함전'이라 부르는 전투에서 중립국 선박을 포함한 모든 상선을 공격합니다. 이것은 국제 해상법에 위배되죠. 첫 번째 대서양 전투가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다!
독일 잠수함은 영국에 물자를 공급하는 모든 선박을 침몰 시켰습니다. 미국의 선박도 말이죠. 이 사건으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중립으로 이득을 보았지만 이를 계기로 여론을 참전 지지로 돌릴 수 있게 되었고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거대한 주도권 다툼에 미국도 가세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의 마지막 공격과 몰락
병사들은 미국군과도 싸우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 병사들은 4년간의 전쟁에 지치지 않았고 모든 전투 자원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독일군이 수적으로 우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루덴도르프 장군은 2차 마른 전투에 마지막 사단을 보냅니다. 결국 전선을 지키려던 최후의 노력은 좌절되었습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약 8천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천만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총탄에 살육되고, 폭탄으로 산산조각이 났으며 불에 타 죽고, 굶주려 죽고, 쥐와 벌레에 갉아 먹히고, 역경에 창궐하는 유행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에서 힘을 합쳐 독일을 물리친 모든 나라의 대표자들이 베르사유 궁전에 모였고, 기나긴 협상 끝에 평화 조약에 서명하기로 합니다. 이 곳에서 독일의 대표자들은 전승국들이 강요하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해야 합니다. 히틀러는 훗날 이 조약을 '명령'이라 불렀죠. 독일은 수치심 속에서 복수를 꿈꾸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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