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독감의 계절에 들어섰는데요. 혹시 독감 예방 접종은 하셨나요? 독감은 독감 바이러스 감염으로 고열과 오한, 두통, 근육통, 인후통, 무력감 등이 발생하고, 심하면 폐렴과 같은 합병증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기까지도 하는 질병인데요. 오늘 다룰 이야기는 인류 역사상 단기간 내에 가장 많이 사람을 죽인 전염병, 스페인독감(Spanish flu/ Spanish influenza)에 대한 것입니다.
보랏빛 죽음, 스페인독감의 등장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3월. 미국 캔자스 주 포트 라일리에서 통증과 열, 오한을 호소하는 군인들이 나타났습니다. 스페인 독감이 시작된 것입니다. 다행히 제1차 유행은 사흘간의 열병에 시달렸을 뿐 조용히 지나갔는데요. 8월에 이르자 살인자의 얼굴을 드러낸 제2차 유행이 아프리카와 프랑스, 미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독감은 매주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죠.
스페인독감은 그해 11월 스페인에까지 퍼지면서 비로소 세계에 그 존재를 알렸는데요. 전시보도 통제를 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비(非) 참전국인 스페인은 이를 바로 보도했고, 스페인독감이라고 이름 붙여지게 됐습니다.
당시 바이러스의 현미경 사진(출처: 위키백과)
스페인독감에 걸리게 되면 열이 나고, 폐를 피 거품으로 채우는 치명적인 폐렴으로 발전하는데요. 몸의 조직에서 산소가 빠져나가 피부가 짙은 보랏빛을 띠게 됩니다. 보랏빛 죽음, 스페인 독감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죠.
특히 스페인독감은 전쟁터의 건장한 청년들에게 가장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1917년과 1919년, 약 51세이던 미국의 평균 수명이 스페인독감이 몰아친 1918년에는 39세로 낮아진 것에서 그 여파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스페인독감, 조선은 물론 전 세계를 휩쓸다
전시 상황 속에서 독감이 퍼지는 것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수천 명의 군인이 기지에서 기지로 옮겨 다니며 전염병을 옮겼고,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수십만 명이 자유 국채 퍼레이드에 참가하기 위해 몰렸습니다. 4개월 만에 스페인독감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졌고, 수많은 사람이 감염됐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1918년 무오년, 조선총독부 통계로 14만 명이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각 학교가 휴교하고, 관청도 문을 열지 못했으며, 농가에서는 추수할 사람이 없어 추수를 못한 논이 절반이 넘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감기의 원인을 독일의 전쟁지에서 감기에 걸린 자가 만주로부터 조선을 거쳐 병을 전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독감의 영향으로 시애틀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에게 전차 탑승이 거부되는 모습(출처: 위키백과)
1918~1919년 발생한 스페인독감 추정 사망자는 2,000만 명에서 1억 명. 인도에서만 2,0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짐작되고 있습니다. 알래스카와 태평양의 몇몇 섬은 거의 모든 원주민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가 약 900만 명이었으니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독감이었던 셈입니다.
스페인독감으로 죽은 화가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도 스페인독감으로 희생됐습니다.
<키스>로 유명한 클림트는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 성과 사랑, 죽음에 대한 묘사로 20대 중반에 황제의 훈장을 받을 만큼 화가로서 명성을 쌓았는데요. 예술가적 기질과 여성 편력이 대단했던 그가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하자 친자 소송을 제기한 혼외자가 십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한편, 에곤 실레의 작품은 공포와 고통, 내밀한 욕망이 뒤틀려있는데요. 매독에 걸려 방탕한 생활을 보낸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요? 실레 역시 젊은 시절, 무절제한 삶을 보내며, 어린 소녀 모델들과의 추문으로 추방당하고, 부도덕한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1914년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전시회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는 등,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임신 6개월이던 아내가 세상을 뜨고, 사흘 뒤 그 역시 2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전쟁에서 살아온 기욤 아폴리네르를 죽게 한 스페인독감
프랑스 현대 시의 심장이라 불리는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도 스페인독감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으로 참전한 기욤 아폴리네르는 관통상으로 큰 수술을 받고 회복해 가던 중이었는데요. 그만 스페인독감에 걸리고 맙니다. 그는 종전을 이틀 남겨두고 세상을 떴는데요.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란 그의 시구는 파리의 미라보 다리에 새겨져 오늘도 흐르는 센 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독감, 예방접종과 건강한 생활 습관으로 예방
우리에게 스페인독감의 정확한 정체가 밝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2005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산하 미군병리학연구소의 제프리 토벤버거(Jeffery Taubenberger) 박사가 알래스카에 묻혀 있던 스페인독감 사망자의 폐 조직에서 바이러스를 분리해 재생하는 데 성공하는데요. 재생 결과 스페인독감의 바이러스는 인플루엔자 A형 중 H1N1형으로 확인됐습니다. 스페인독감이 닭도 죽이고 인간도 죽이는 인수공통 전염 바이러스이며, 조류인플루엔자에서 시작되었음이 밝혀진 것이죠.
우리나라의 경우, 매년 12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가 독감 유행 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예방백신은 매년 겨울철이 다가오기 전 10월에서 11월 접종해야 하고, 접종시기를 놓쳤더라도 독감 절기 중 접종하는 것이 좋습니다. 접종에 의한 면역력은 최소 2주부터 생기며, 최대 1년 정도 유지됩니다.
한편, 독감은 바이러스의 변이가 잘 일어나기 때문에 예방접종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독감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는 것이 필요한데요. 30초 이상 비누로 손 씻기 등 위생을 철저히 하고, 충분한 수면과 균형 잡힌 식사, 적정한 온도와 습도 유지로 겨울철 건강을 챙기시길 바랍니다.
참고 문헌_브린 바너드, 김율희 역, <왜 독감은 전쟁보다 독할까>, 다른,
앨프리드 W. 크로스비, 김서형 역, <인류 최대의 재앙, 1918년 인플루엔자>, 서해문집,
프레데릭 살드만·프랑수와 브리케르, 전용희 역, <바이러스 대청소>, 비전코리아,
오승현, <뚝딱 교양 상식>, 다산에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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