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사랑

김영식구본능하늘 2016. 2. 29. 00:56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사랑

 

                                                                   <나폴레옹 대관식 / 다비드>

 

"조세핀" 은 카리브해의 '마티니크' 섬에서 이주한 백인의 후손으로 "마리 로즈 조세프 타세르 드 라파제리에"라는 긴 세례명을 얻었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에게는 '조세핀'황후로 더 잘 알려져있다.

 

만남

 

'조세핀'은 1779년 '비콩 알렉산드르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건너갔고, 같은해 에 코르시카 섬의 10살난 소년은 브리앵의 프랑스 군사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이 소년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보아르네와 조세핀의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고,1794년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보아르네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면서 둘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조세핀'과 '나폴레옹'이 처음 만난 것은 1795년, '나폴레옹'이 왕실 경호군의 공격을 받은 공화당 정부를 돕기 위해 파리로 왔을 때이다.

젊고 혈기 넘치는 포병장교 '나폴레옹'은 24시간 안에 왕실 경호군을 패주시키고 혁명군의 수호자로 환영받았다.
파리의 아가씨들이 이 젊은 코르시카 출신 영웅을 환대했지만,
전쟁에서 그토록 용감하던 '나폴레옹'은 여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수줍어했다.

하지만 '조세핀' 보아르네를 만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전쟁 틈틈이 '조세핀'에게 열렬히 연애편지를 보냈고, 군사회의 중간에 틈을 내어 '조세핀'의 저댁으로 달려가 깜짝 놀라는 그녀의 친구들 앞에서 '조세핀'을 포옹했다.


'나폴레옹'이 긴장을 풀 수 있는 것은 '조세핀'과 함께 있을때 뿐이었다.

매력적인 검은 눈동자와 원숙미 그리고 카리브해 지방 특유의 억양을 지닌 그녀는 늘 초조하고 ?기는 듯한 '나폴레옹'에게 최고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친구에게 '조세핀'의 매력에 대해 "그녀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여자였다"라고 설명했다.


1796년 3월, 이탈리아에 있는 오스트리아 군과 전투 중인 프랑스 육군을 지휘하기 위해 떠나기 전날 밤, '나폴레옹'은 '조세핀'을 시장 사무실로 끌고가 자고 있던 시장을 깨워 억지로 결혼 서약을 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보다는 6살 연상이었는데, '나폴레옹'은 자신의 나이를 두 살 올리고 '조세핀'의 나이를 네 살 깎아 결혼증명서에는 둘의 나이를 동갑내기인 것으로 기록하였다.


결혼 후 이탈리아에 가서도 '나폴레옹'은 2~3일에 한 번씩 '조세핀'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녀를 향한 사랑을 전하며,부디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달라고 애원했다.

 

단 하루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없고,
당신을 마음에 품지 않고 보내는 밤이 없소.

내 인생이자 영혼인 당신한테서 떠나오게 만든
나의 야망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한없이 원망스럽소.

부대를 돌보는 중에도, 부대를 진두지휘하는 중에도
병영을 사열하는 중에도, 연모하는 나의 '조세핀'은
내 마음속을 휘젓고 내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소...

 

 

이혼  

 

나폴레오의 부대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무찌르고 그는 차츰 명성이 높아졌다.

그는 동방원정 부대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공화당의 제1통령이 되었고, 급기야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였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자신의 가문이 왕국을 영원히 다스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조세핀은 그의 꿈을 이루어주지 못했다.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도 그녀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조세핀'을 싫어했던 '나폴레옹'의 친척들은 그에게 '조세핀'과 헤어지고 아들을 낳아 줄 수 있는 새 아내를 맞이하라고 종용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나폴레옹'은 '나라를 위하여'라는 이유로 '조세핀'과의 이혼을 결심 했다.


황실의 공식적인 이혼발표에 '조세핀'은 의연하게 대처했다.
"가문의 권익과 프랑스의 복지를 지켜줄 후계자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나는
기꺼이 그에게 이 세상의 그 어떤 남편도 받아보지 못한 애정과 헌신의 증표를 주고자 한다"라고 '조세핀'은 법정에서 발표했다.


이혼 석 달 후 '나폴레옹'은 18세 된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스'와 결혼했고, 1년안에 아들을 얻었다.

그토록 원했던 후계자를 얻은 '나폴레옹'은 아들에게 '로마왕'의 직위를 내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조세핀'을 잊지 못했고, 조세핀에게 나바르 여공 작위를 내렸고, 막대한 연금을 지급하였으며 죽을때까지 서신을 교환하였다.

나폴레옹은 운이 다해 1814년 엘바 섬으로 유배되자 마리 루이스가 아닌 조세핀이 유배 생활을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죽음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오래지 않아 조세핀은 디프테리아에 걸렸고 1814년 5월 29일, 나폴레옹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1815년 2월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조세핀이 목숨을 거둔 라 말메송의 방에 혼자 틀어박혀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아름다운 조세핀이여,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그 여인이었다"


1821년, 두 번째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 나폴레옹은 조세핀의 초상화를 쳐다 보았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프랑스..."라고 말했다.
그리고 "군대..." "군대의 선두에는 '조세핀' !"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죽는 순간 나폴레옹은 자신이 사랑했던 세 가지를 불렀는데, 그 중 가장 사랑했던 것은 역시 '조세핀'의 이름이었다.

출처 : 청랑 김은주가 머무는 사랑의 공간
글쓴이 : 청랑 김은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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