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짧게 쓴 라면의 역사이야기

김영식구본능하늘 2016. 2. 19. 03:58
[블로그] 곱배기라면을 아시나요
물이 보글보글 끓을 때부터 바빠진다.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물이 끓기 전, 봉지에서 라면을 꺼내둔다. 스프봉지도 살짝 찢어놓는다. 좀 게으르면 어떠랴(부지런했다면 라면을 끓어 먹겠나). 라면은 물이 끓은 뒤 3분 안에 모든 것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심플한 음식이다.

물이 끓으면 고불고불한 면과 스프를‘탁탁’털어 넣는다. 슬슬 라면 특유의 향미가 난다. 파를 송송 썰어 넣고, 계란도 ‘탁’하니 풀어 넣는다. 총총 썰어 놓은 신 김치를 곁들이면 한 끼 식사가 된다. 먹다 남은 찬밥이 있으면 ‘딱’이다. 라면에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따뜻한 밥이 찬밥이다. 어머니와 자취생의 고민꺼리를 해결해 주는 것도 라면이다.

진한 국물은 술 많이 마신 다음날 해장 할 때 그만이다. 꼬불꼬불 야들야들한 면발은 출출할 때 밤참으로 딱이다. 후루룩 쩝쩝. 면발 쭈욱 빨아, 씹지 않아도 목으로 술술 잘 넘어간다. 라면에는 탱탱한 면발, 얼큰한 국물과 함께 추억이 있다. 라면은 추억을 먹고, 그 추억을 먹은 라면을 사람들이 먹는다. 지지리도 가난했을 때 먹었던 라면, 군대에서 눈물 흘리며 쓸어 넘겼던 라면은 쉬이 잊지 못한다.

사람들은 라면의 매운 맛에 길들어졌다.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말하듯.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 나온 업그레이드 라면에 입맛을 길들이지 못한다. 튀기지 않는 생면이 뜨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가장 많이 팔리는 라면은, 신라면·안성탕면·삼양라면·진라면 등등이다.

 

 

 


라면이 나온 것은 1963년. 삼양라면에서 처음 만들었다. 뒤를 이어 농심도 라면을 내놓았다. 신한제분의 ‘닭라면’, 동방유량의 ‘해표라면’, 풍년식품의 ‘뉴라면’, 풍국제면의‘아리랑라면’등도 잇따라 나왔다. 하지만 70년대부터 삼양과 농심 2개 업체의 양강 구도가 이어졌다.

라면이 전성기를 맞은 때는 1980년대. 83년 한국야쿠르트, 84년 청보식품, 86년 빙그레, 87년 오뚜기라면이 차례로 라면시장에 뛰어들었다. 80년대 들어 소득수준이 높아져 라면 값이 ‘껌값’처럼 부담이 낮아진데다, 프로야구와 아시안경기 등이 스포츠가 활성화되면서 운동장에서 먹는 컵라면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80년대 라면시장에 뛰어든 업체 가운데 청보식품과 빙그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먹고 싶지만 더 이상 먹지 못하는 라면이 됐다. 그래서 더욱 두 회사의 라면이 생각이 난다.

먼저 청보(靑寶)식품. 이 회사는 어느 날 갑자기 나왔다 2년 만에 사라졌다. 영라면, 열라면, 알짜배기, 진곱배기 등을 내놨지만, 뭐니 해도 히트작은 곱배기라면이다. 코미디언 이주일씨와 당시 최고의 가수 김수철씨와 함께‘청보 곱배기라면’광고를 하면서 한때 불티나게 팔렸다. 값은 삼양이나 농심 라면 보다 20% 비싼 반면 면의 양이 50% 많았다.

당시 군대에 가 있던 사람들이 청보라면을 많이 먹게 돼, 군출신인 전두환 대통령과 청보가 관계가 있다는 식의 소문이 많이 나돌았다. 당시 청보식품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이순자가 만들었다.’ ‘대우 그룹의 위장 계열사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투자했다’ ‘청보가 ‘청와대의 보물’이란 뜻이다’라는 식이다. 청보는 5공화국이 끝나는 시기에, 전두환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씨의 친인척이 관계돼 있다는 의혹이 있던 시기에 간판을 내렸다. 

청보의 모 회사는 풍한방직이라는 섬유회사였다. 풍한방직은 8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사업을 찾다, 1984년에 풍한방직 회장의 셋째 아들이었던 김정우씨(당시 풍한방직 사장)를 회장으로 해 청보식품을 창업했다. 청보식품은 당시 삼양그룹 임원과 직원들을 무더기로 스카우트했다. 또 사장에는 육군소장 출신인 장기하씨를 앉힌다. 군사정부 시절이어서 아무래도 군납 라면에 영향이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면사업에 뛰어든 이듬해 삼미 슈퍼스타즈 야구단을 인수하고 청보 핀토스로 야구단을 출범시켰다. 야구단을 통해 상품 마케팅에 활용하기도 했다. 야구장에서 청보 컵라면을 나눠줬는데, 야구 성적이 신통치 않아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청보식품의 라면 맛은 당시 농심, 삼양에 견줘 상당히 떨어졌다. 시장 점유율도 함께 떨어졌다. 게다가 모기업인 풍한방직이 87년 방직산업 불황으로 부도를 맞고 문을 닫게 된다. 야구단 청보 핀토스는 1987년 말에 태평양에 팔리고, 청보식품은 오뚜기에 매각된다.

빙그레는 청보와는 조금 다르다. 아이스크림과 음료가 주종이던 빙그레는 86년 겨울철 매출 보강을 위해 라면시장에 진출했다. 빙그레는 ‘뉴면’ ‘맛보면’ ‘매운콩라면’ 등을 내놓은데 이어 컵라면에 건조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는 ‘햇쌀담은 캡틴’ 등의 컵라면도 출시했다.

빙그레가 라면을 접은 것은, 한화 김승연 회장과 빙그레 김호연 회장과의 재산권 분쟁의 결과이기도 하다. 80년대 말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 사장인 김호연 회장은 그룹 경영감사에서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명예 퇴진 당한다. 그 뒤 김호연 회장이 재산권 반환 소송을 제기하는 등 형제간 재산권 다툼이 빚어지기도 했다. 결국 92년 빙그레는 한화그룹에서 분리된다. 부채 비율 4183%, 10년 누적적자가 420%였다. 빙그레는 그 뒤 구조조정 차원에서 2000년 초코케이크, 2001년 베이커리 사업을 매각했다.2003년에는 매년 30억~40억 원씩 적자를 기록하는 골칫덩이 사업이었던 라면 사업에서도 철수하게 된다.

<한겨레21> 정혁준 기자

 

출처 : 즐겁게 라면먹고 사는 인생
글쓴이 : 소똥이만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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