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존경합니다 구자관 회장님

김영식구본능하늘 2015. 10. 11. 15:19
사회

 

[Why] [그 사람 그 후] 삼구아이앤씨 회장 구자관

 

 

"가난했으되 '열정의 두 손'이 있었기에…"
부친 사업 실패로 초등학교 졸업 못해…제대 후 공장 설립… 화재로 자살 시도…
1976년 2명으로 청소대행업체 창업… 34년 만에 직원 8000명 용역회사로…

지난달 15일 창업 34주년을 맞은 삼구아이앤씨 회장 이름은 구자관<사진>이다. 올해 나이 예순여섯이다. 삼구아이앤씨는 청소, 경비 등 용역업을 하는 기업이다. 구자관은 기념식 무대에 올라가 기념사를 읽어내려갔다. "열정은 멋진 꿈을 가진 사람을 도와주는 힘이고, 열정은 확신을 낳고 평범한 사람을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열정만 있으면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념사를 든 구자관의 손은 이리 생겼다〈아래 사진〉. 젊은날 공장에서 일하다가 전기톱에 양쪽 손가락이 절반쯤 잘려나가고, 공장을 뒤덮은 화마에 손은 물론 온몸을 이식한 피부로 장식한 고난의 손이다. 그리고 열정의 손이다.

지난해 구자관과 그의 손에 대해 조선닷컴에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존경한다는 댓글을 올린 것으로 기억한다. 존경. 구자관이 말했다. "나는 악몽이다."

"사람들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뭘 하겠다, 좋겠다들 하는데, 나는 절대로 안 돌아간다. 나에게 젊은 시절은 악몽이었다." 지독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가난한 시절을 딛고 구자관은 통쾌하게 성공을 거뒀다.

1944년 어머니부터 외삼촌, 이모들까지 외가 다섯집에서 몇 달 차이로 아들들이 태어났다. 다섯 형제는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구자관이 말했다. "중학교 입학하던 날, 형제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갔다. 내 어깨에는 아이스케키통이 메여 있었다."

구자관의 손이다. 고난과 악몽과 눈물과 좌절과 희망과 성공과 겸손이 모두 이 손에서 비롯됐다. 본인은 "창피하다"고 했지만, 이리 찬란한 손이 어디 있는가. / 박종인 기자
양계공장, 고무공장 등등 손을 댄 사업마다 아버지는 실패했다. 슬하에 있던 7남매는 외갓집으로, 고모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결국 초등학교는 졸업하지 못했다. 낮에는 아이스케키통과 구두통, 메밀묵통을 들고 다녔고 밤에는 야학을 다녔다. 그러다 너무너무 공부를 하고 싶어서 서울 용문고등학교 야간학부에 들어갔다.

새벽부터 낮까지 공장에 다녔고 밤에는 학교로 갔다. 하교 후면 동대문에서 미아리 집까지 걸어갔다. 한 달 버스비를 모으면 책 한 권을 살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새벽 4시 30분이면 깨웠다. 공장 가라고, 얼른 일해서 돈 벌라고. "나중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게, 그 새벽에 너를 깨우는 게 힘이 들었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굉장히 아팠다.' 그런데 그거 안 가면 학교에 못 가니까. 그렇게 당신 맘에 못이 됐던 것 같다." 구자관은 두 아들, 딸에게 이야기한다. "우리 집 가훈은 두말할 것 없이 '스스로 해결하자'다." 1968년 군대를 갔다 와 청소용 왁스 공장을 차렸다. 8년 만에 공장에 불이 났다. 자동차를 몰고 잠수교로 달려갔다. 오늘은 기어코 죽는다. 운전 미숙으로 잠수교 위로 튀어 올라 있는 교각을 들이받는 바람에 죽지도 못했다.

그때 이민 갔던 형이 귀국해 말했다. 청소용품만 팔지 말고, 미국 한인들처럼 청소를 대행해보지. 그리하여 1976년 직원 2명으로 시작한 청소대행업체가 34년 만에 직원 8000명에 연 매출 2000억원을 넘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삼구아이앤씨는 용역회사다. 경비보안, 환경과 시설 관리도 업무다. 2010년 현재 200여개사에 총 500여개 사업장을 용역 관리한다. 이들 사업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정규직이다. 의료보험·산재보험·고용보험에 가입된 정규직이다.

대개 청소하는 사람은 '아줌마'로 통칭된다.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3D. 그들을 구자관은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남편과 자녀들 뒷바라지를 다 해놓고 일터에 가서 남들 하기 싫은 궂은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존경받아야 할 여사님이지 왜 아줌마인가."

25년 근속한 직원이 승진해 사장이 됐다. 구자관은 명함을 새로 만들었다. '대표책임사원'. "회사는 직원들 것이다. 회사에 사장이 있으면 됐지 무슨 회장인가. 나는 이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원 가운데 대표일 뿐."

구자관은 "새로운 계약을 따내면 기존 용역업체 직원을 정직원으로 채용한다"고 했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아줌마'라고 불리다가 '여사님' 하고 대우가 달라지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에서 신분 또한 바뀐다. 업무의 품질도 180도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약 업체가 늘어나고 재계약을 하는 업체가 늘어나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구자관이 말했다. "이런 가난은 누구나 가지고 있던 가난이다. 그런데 내가 조금 달랐다고 한다면,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거에 도전한다는 점 정도?"

평생 장난감 하나 못 가져보고 살았는데 이제 안정도 됐고 돈도 여유가 생겼겠다, 어느 날 한번 '놀아보고' 싶었다.

스키를 배우기로 했다. 56세 때였다. 주위에서 "너 뼈 부러지면 붙지도 않는다. 관둬라"고 펄펄 뛰고 말렸다. 지금은 최상급 코스 '직벽'에서 논다. 대신에 무릎 연골이 상해서 수술 두 번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하고 싶었다. 용인대 경찰행정학과에 입학했다. 61세였다. "학교 다니다가 죽을 수도 있는 나이니, 입학식 때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태권도 학점 F 받아서 재수강하고 졸업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싶었다. 2008년 64세였다. 미국에 있던 딸이 날아왔다. "아빠, 오토바이만은 제발!" "내가 말린다고 안 할 사람이냐. 상관 마라." 시험 합격과 동시에 할리 데이비슨 사서 가죽잠바에 바지, 부츠, 고글, 마스크에 쇠사슬 주렁주렁 달고 타고 다닌다.

작년에는 "노인 문제 연구하고 싶어서" 서강대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서강대대학원 사상 최고령 석사과정 학생이다.

"가장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친구들이 나이 얘기할 때 늘 그런 말 한다. 늦어서 못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늘의 별도 딸 수 있는 게 사람의 능력이다. 내가 쉰여섯에 스키 배운 게 자랑 아니다. 예순한 살에 대학 간 거 훌륭한 거 아니다. 예순넷에 바이크 탄 거? 훌륭한 일 아니다. 다만 내가 모험적일 뿐. 그때 안 했으면 지금 오토바이 옆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평생 '타보고 싶었는데' 하다 갈 거 아닌가. 죽으면 어떡해? 오래 사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손가락 잘릴 뻔했을 때 포기했으면 불가능했고, 잠수교 교각에 자동차 처박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사내가 지금 하늘의 별을 따겠다고 이야기한다.

"내 평생 두 가지 하지 않는 일이 있다. 내세울 거 없이 남부끄러운 사람이니, 몇 년 전 한번 한 이후 '강의'는 절대 하지 않는다. 또 주례도 절대 하지 않는다. 주례는 옛날에 화려했고 앞으로 행복할 사람이 하는 거다. 나처럼 불행하고 힘들었던 사람이 주례를 서면 그 부부는 힘들어질 수 있다. 그래서 안 한다." 그가 피식 웃었다. "사실은, 직원 8000명 가운데 주례를 못 모실 분들이 많다. 그분들 부탁에 한번 주례 서면 나는 일요일도 없이 계속 그 일 해야 한다. 어떡해? 안 서야지."

며칠 전 그에게 전화를 했다. 여전히 오토바이를 몰고, 여전히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그가 말했다. "또 손 이야기? 창피해, 안 쓰면 안 될까?" 수화기 저편 의 대표책임사원은 여전히 꿰맨 낡은 바지를 입고 있음이 분명했다.
출처 : 황금산
글쓴이 : 황금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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