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

김영식구본능하늘 2015. 10. 9. 19:55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

 

 

먼저 집현전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집현전은 학자양성과 학문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가장 중요한 직무는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집현전관은 외교문서 작성도 하고 과거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했으며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들 중 일부는 사관(史官)의 일을 맡기도 했으며 중국 고제(古制)에 대하여 연구하고 편찬사업을 하는 등 학술사업을 주도하는 기관이었습니다.

- 경연 : 왕과 유신이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로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 서연 :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위해 수많은 전적(典籍)을 사들이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는 한편, 재주 있는 소장 학자에게는 사가독서(賜暇讀書)등의 특전을 베풀었다 전해지기도합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

 세종 20년대부터 집현전은 정치적인 역할도 하게 됩니다. 세종은 1442년에 첨사원을 설치하여 세자가 서무를 처결하게 하였는데 이때 첨사원의 관원 후보로는 서연관이 가장 유리하였으며 이 서연관은 모두 집현전관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집현전관은 첨사원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1443년부터는 세자(문종)의 섭정이 이루어졌으므로 집현전관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문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집현전관의 정치기관으로의 진출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글은 세종 25년에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강희안, 이선로 등)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때 집현전에서 잠든 신숙주에게 세종이 친히 용포를 덮어준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1. 집현전 학자들, 한글창제를 반대하다.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인물은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를 대표로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 모두 일곱 명의 학자들로 이들 모두 당시 집현전의 최고위치에 있던 원로학자들이었습니다.

다음은 이들이 올린 반대상소 중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여섯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셋째,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넷째,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 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헤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섯째,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문종)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들이 반대한 여러 이유 중에는 훈민정음창제를 자신들과 상의하지 않았던 섭섭함이 표출되어 있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들은 훈민정음의 창제를 전혀 몰랐다는 얘기가 됩니다. 

최만리

  세종 임금은 이에 대해서 세세히 답변하지는 않고, 설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고자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먼저 밝히고, 다만 넷째 의견에 대해서 사리를 모르는 속된 선비의 생각이라고 비판하고, 여섯째 의견에 대해서 한글의 중요함에 비추어 동궁이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변하였습니다.

 세종에게 반대상소를 올린 최만리와 신석조,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은 의금부에 갇혀 있다 이튿날 석방되었으며 정창손은 파직을 당하게 됩니다만 왕에게 반항한 결과치고는 세종의 처벌은 경미했다 볼 수가 있습니다. 이때 반대상소에 올린 6가지 항목에 대해 세종이 일일이 답을 한 점 또한 세종이 처벌보단 설득을 우선시하는 훌륭한 군주임을 증명해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2. 병약한 세종, 거대 프로젝트를 혼자 진행했을까?

 세종은 격무와 지병으로 말미암아 승하하기 5년 전부터 세자인 문종에게 정사를 맡겨 맡겨 대리청정하게 하였지만, 사실은 훨씬 오래전부터 세자에게 일부 업무를 위임할 정도로 건강은 그리 좋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었으며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집현전 학자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세종은 구원군을 가까운 곳에서 찾게되는데 바로 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세종은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 그리고 출가한 둘째딸 정의공주까지 한글창제 작업에 참여시킵니다.

 여기서 정의공주의 역할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데요. 정의 공주은 세종이 차녀로 언니인 정소공주가 요절한 후 세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인물입니다. 정의공주의 시댁인 안맹담의 족보에는 "정의공주가 아버지를 도와 그간 아무도 풀지 못했던 한글의 변음과 토착(민간용어 또는 사투리)을 풀어 올렸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던 대군들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공주가 풀어냈으니 세종께서는 또 극찬을 하시며 상으로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셨다"라고 전해집니다. 이 또한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 세종의 직계 가족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합니다.


3. 한글훈민정음과 집현전 학자

 만일 한글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동원되었다면 아마도 최만리를 대표로 한 집현전의 원로학자들이 아닌 집현전의 일부 소장파 학자만을 따로 모아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거라 판단됩니다.

 하지만, 앞선 포스트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신숙주가 성삼문과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한림 학사 황찬을 찾아가 한글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조선 왕조실록에 신숙주가 최초로 요동에 간 것은 1447년 1월로 한글이 만들어지고 나서 1년 2개월 후의 일이라 이 또한 사실이 아닌듯합니다.

따라서 한글 창제는 철저한 보안 속에 자녀들을 데리고 추진한 10여 년간에 걸친 거대 프로젝트였던것입니다.



 

 세종 10년 진주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효자 충신등의 사례를 담은 책의 발행을 지시하는데. 이 책이 바로 "삼강행실도"입니다.

 삼강행실도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림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과 함께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넣었는데 이때에도 세종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림만으로는 제대로 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워 하니 이것이 문자 창제의 필요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어리석은 백성과 문자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하는데 바로 훈민정음 서문에서 입니다.

 삼강행실도에도 어리석은 백성이 알 수 있는 한글을 붙이고 싶었던 세종의 꿈은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물거품이 되었으며 "한글 삼강행실도"는 결국 성종 때 세상의 빛을 보게됩니다. <어떤 오후>


 

출처 : 태극기사
글쓴이 : 道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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