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고 정주영 회장의 감동실화

김영식구본능하늘 2015. 9. 26. 19:13

 

 

 

◈◈ 고 정주영 회장의 감동실화 ◈◈

 

 

1915년 11월 2일 ~ 2001년 3월 21일

 

 

◈◈ 고 정주영 회장의 감동실화 ◈◈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1975년 여름 어느 날,

박 정희 대통령이 현대건설의 정 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렀다.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십시오.

만약 정 사장도 안 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抛棄)하지요.”

정 회장이 물었다. “무슨 얘기입니까?”

 

'1973년도 석유파동으로 지금 중동국가들은 달러를

주체하지 못 하는데 그 돈으로 여러 가지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은데,..

 

너무 더운 나라라 선뜻 일하러 가는

나라가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관리들을 보냈더니, 2주 만에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없어

공사를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요, 오늘 당장 떠나겠습니다.”

 

정 주영 회장은 5일 만에 사우디에서 돌아와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박 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요?”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입니다.”

 

“뭐요!”

“1년 12달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쉬지 않고

공사를 할 수 있고요.”

 

또 뭐요?”

“건설에 필요한 모래, 자갈이 현장에 많이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고요”

 

“물은?”

그거야 그 근방에 어디서 실어오면 되고요.”

 

50도나 되는 더위는?”

천막을 치고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고요.“

 

박정희 대통령은 부자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실장, 현대건설이 중동에 나가는 데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줘!..”

 

정주영 회장 말대로 한국 사람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을 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그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그 결과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들어왔다.

 

= 옮긴 글 = 

 

- 고 정주영 회장님 감사합니다. -

 

처칠 전 영국 수상의 말이 생각나네요..

◈☞"포기하지 말라!(Never Give Up!)"

 

 

 

 

◆◆ 아산 정주영 회장 이야기 ◆◆

 

 

소문난 구두쇠 부부였지만,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 두 사람이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지갑을 열 때가 있었다.

가끔 지갑을 열 때는 불우한 이웃을 도울 때였다.

 

“여보, 우리도 이제 잘 살게 되었으니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합시다.”

 

“걱정 마세요. 당신이 쌀 한 가마니를 누구에게

주라고 하면 나는 두 가마니를 주는 사람이니까.”

 

“아이고, 이래서 내가 우리 몽구 어멈에게는

돈을 못 맡긴다니까.”

 

“기업은 규모가 작을 때는 개인의 것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직원 공동의 것이요,..

 

나아가 사회·국가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경우, 옛날 쌀가게를 했을 무렵까지의

그 것만 내 개인의 재산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주영 회장의 경영철학이며 소신이었다.

 

인정이 많았던 아내 변중석 여사 역시 설과 추석

전후로 며느리들을 데리고 고아원과 노인정을

방문하는 일을 명절 때마다 빼놓지 않았다.

 

변중석 여사는 자신이 재벌가 사람임을

드러내지 않았고, 기부금도 생활비를 줄여서

저축한 돈을 찾아 가지고 갔다.

 

현대건설 설립 30주년이 되던 해인 1977년. 7월에

정주영은 그동안 가슴에 품어두었던 중대발표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우한 이웃을 돕겠습니다.”

 

자신이 가진 현대건설 주식의 50퍼센트로 사회복지

재단을 만든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50퍼센트면 얼마야? 400억 원? 그 당시에는 엄청난 돈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 정말 대단한 사람일세.”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이러한 파격적인 언행을 두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많았다.

 

“에그, 진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건지, 재단이랍시고

만들어서 회사 돈을 빼돌리려는 건지, 아니면

세금 혜택이나 노리는 건지, 그 속을 어찌 알겠소?.”

 

이런 오해를 받은 이유는 당시 정부가 발표한

‘기업공개 대상’에 현대가 1순위로 올랐기 때문이다.

 

기업공개란 기업의 주식을 일반인들도

거래할 수 있도록 시장에 내놓는 것을 말한다.

 

주식을 산 사람은 누구나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당시 현대는 미국 경제전문지인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현대건설은 1958년 전후 복구 사업의 일환이었던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시작으로 경인고속도로,

소양강댐, 고리원자력발전소, 1965년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거쳐 주베일 산업기지 항만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10억 달러 건설의 수출 탑을 쌓았다.

 

총매출액이 1350억 원을 육박하니 기업의 재산이

대한민국에서 제일로 큰 회사였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기업공개를 촉진했는데,

그 수준은 거의 강압적인 자세로 압력을 가해왔다.

세상의 전반적인 여론도 그렇게 돌아갔다.

 

“국민이 함께 키운 회사를 개인의 것으로만 두려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 회사가 모범을 보여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니오?.”

 

정직과 신용이 밑천이라고 여긴 정주영 회장은 정치

변화기에 많은 재산을 강제로 빼앗기면서도 탈세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정당한 경영 활동을 해왔다.

 

또한 다른 사람이 힘들여 창업한 기업을 손쉽게

얻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여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정당한 경영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기업의

이익에서 세금을 내고 남은 30퍼센트 이상을

고용증대와 재투자에 썼다.

 

이렇게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도덕한 기업으로 언제라도 몰릴 판이었다.

 

억울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공개의 결과에 대해서 정부와 의견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기업공개만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최선의 방법일까?’

정주영 회장의 생각에는 그래봐야 부자들만 주식을

사서 더 많이 부자가 될 것이 뻔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야 옳지 않은가!..

 

즉 정부가 의도한 기업공개의 본래 취지와

그 결과가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랜 고민 끝에 정주영 회장은 주식 공개는 하되,

현대건설 주식의 50퍼센트로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현대건설을 주식 시장에 공개하면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이 주식을 사서 돈을 벌고, 주식을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은 혜택을 보지 못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현대건설 주식의 50퍼센트를 아산사회복지재단에

아무런 조건없이 내놓은 것입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기업가로서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당시에도 일부 기업들이 복지 재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나눔을 실천하지 못 했다.

 

정주영 회장은 그들과 달리 한국에도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기업가 정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난과 질병을 없애는 데에 앞장설 복지 재단의

롤모델로 미국의 유명한 사회복지재단인 ‘카네기재단',

‘록펠러 재단’을 모델로 삼았다.

 

새로 만든 복지 재단의 사업은 크게 의료, 사회 복지,

연구 활동 지원, 장학 사업 4개 부문이었다.

 

돈이 없어 목숨을 잃는 사람, 돈이 없어 공부를

포기하는 사람, 돈이 없어 가족에게 버림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농어촌 벽지에 병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의료 보험이 극히 일부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그중에서도 농어촌 벽지에 사는 주민들은

심각한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정주영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을 통해 정읍을 시작으로

보성, 인제, 보령, 영덕 등 5곳에 병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100억 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 복지 사업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놀랍고 획기적인 복지 사업입니다.

하지만 왜 다른 종합병원이 도시에 몰려 있겠습니까?.

지방도시나 벽지에 병원이 있으면 적자를 면할 수

없는 게 자명한 현실입니다.”

 

“돈을 벌자고 하는 사업이 아닌 건 알고 있지 않소.”

 

“의료진 확보도 어려울 겁니다.

의술은 기술을 넘어선 인술입니다.

기업 운영과는 전혀 다릅니다.

 

숙련공을 양성하듯 단기간에 인재를 키울 수 없어요.

의사 확보는 의료 사업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벽지로 오려는 의사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걱정이 많았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문제 해결방법을

고민하고 추진한 결과 드디어 아산병원이 문을 열었다.

 

병원은 유례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것을 본 반대론자들도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아산병원은 벽지 주민들에게 비교적 저렴한 값에 양질의

의료 혜택을 제공했고, 극빈자에게는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물론 예상대로 병원 운영은 막대한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이 병원의

적자 부분을 넉넉하게 지원하도록 했다.

 

또 사명감을 가진 의사들이 인술을 펼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서울중앙병원 개원, 금강병원 인수와

홍천병원 개원 등 지속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장학 사업도 남과 다르게 실천했다.

해마다 50억 원을 사회 복지,

연구 활동 및 장학 사업에 지원했다.

 

대학교수 149명에게 연구비를, 1000명의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매년 지급했고, 불우한 이웃과 신체 부자유자

등을 위해 봉사하는 사업에 매년 3억 원을 지원했다.

 

장학금의 경우, 성적 우수자는 물론이고 저소득층 자녀와

근로 학생에게 성적에 관계없이 지급한 것이 특징이었다.

 

사실 기업들의 기부나 복지 재단을 통한 사회 공헌

활동이 중요하게 인정받은 때는 1950년대였다.

 

1953년 미국의 재봉틀 회사였던 AP스미스 회사가

대학발전기금이란 명목으로 프린스턴 대학에 1500만

달러의 기부금을 냈는데 이 회사의 주주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침해당했다고 원인무효 소송을

법원에 제기한 일이 미국에서 있었다.

 

뉴저지 고등재판소는 “기업은 좋은 시민성을 가질

의무를 지니고 있으므로 기부 행위가 직접적으로

기업의 이익에 연결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인정한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다른 선진국의 기업들도

대체로 이 입장을 수용해서 기업의 복지, 공익

사업을 하나의 사회적 책임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970년대 말까지도 그런 개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기업이 없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가난을 벗어나 잘살아보겠다는

노력이 물질만능주의로 치닫고 있었다.

 

특히 이윤을 남기는 것이 목표인 기업가들에게

사회 복지에 대한 책임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기업의 바탕이 되는 사회와 국가가 건강해야 기업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라는 정주영 회장의 생각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고, 한국 최초의 대규모 민간

사회 복지 사업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현재까지 기업들이 벌이는 다양한 사회 복지

활동의 원동력이며 새로운 씨앗이 됐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성공 신화를 써내려 간 정주영 회장은

‘이 세상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꾸준한 노력과 신념으로

열심히 일하면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세상’의

모범적인 선구자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연보 ◈◈

 

1915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 출생

 

1930 송전소학교 졸업

 

1931 1차 가출, 함경북도 원산 고원 철도

 

공사판 노동 2차가출, 금화 공사장 노동

 

1932 3차 가출, 경성실천부기학원 수강

 

1933 4차 가출, 인천 부두 하역 노동,

건설 현장 노동

 

1934 복흥상회 쌀 배달 점원

 

1938 미곡상 경일상회 개업

 

1939 변중석 여사와 결혼

 

1940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 개업

 

1946 현대자동차공업사 개업

 

1947 현대토건사 개업

 

1950 현대건설 주식회사 설립

 

1953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 수주

 

1957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수주

 

1965 태국 파티니나라타왓 고속도로 건설공사 수주

 

1967 소양강 다목적댐 공사 수주

 

1968 경부고속도로 공사 착공, 포드 자동차

 

조립기술 협정 체결, 코티나 자동차 생산

 

1970 현대시멘트사 설립, 경부고속도로 완공,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착공

 

1971 현대그룹 회장 취임

 

1972년 26만 톤급 유조선 2척 수조,

현대조선소 착공

 

1973 현대조선중공업 주식회사 설립

 

1974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취임

 

1975 현대미포조선 주식회사 설립

 

1976 포니 자동차 생산, 현대상선 설립,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

 

1977 한국 경제인연합회 회장 피선,

아산사회복지재단 설립

 

1981 제24회 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피선,

서울 올림픽 유치 성공

 

1982 대한체육회장 피선

 

1983 현대전자 주식회사 설립

 

1984 서산 간석지 사업

 

1985 아시아 최장의 말레이시아 페낭교 완공

 

1988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현대석유화학주식회사 설립

 

1989 한소 경제협력위원회 회장 취임

 

1992 통일국민당 창당, 대표 최고위원 취임,

14대 국회의원 당선, 14대 대통령 선거 출마

 

1993 탈당 및 국회의원직 사퇴

 

1994 현대그룹 명예회장직 취임,

러시아 고르바초프 수상 면담

 

1995 중국 장쩌민 수상 면담

 

1998 소떼와 함께 군사 분계선 통과 방북,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 금강산 개발사업 개시

 

1999 현대아산 주식회사 설립, 대북사업 전담

 

2000 현대그룹 명예회장직 사퇴

 

2001 러시아 푸틴 대통령 친선 훈장 수상,

2001년3월21일 향년 86세로 타계하셨음...   

 

 

 

경영철학은 “세 가지의 동물철학”

 

고 정주영 회장님의 교훈적 말씀입니다.

 

1. 빈대 철학

 

빈대에게 한 수 배운 고 정주영 현대 회장

 

“빈대만도 못한 사람”이란 말은 고(故)정주영 회장이

부하직원을 야단칠 때 쓰시던 말씀이다.

 

정 회장의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이 혹

세속적이고 저질스런 말로 들리겠지만 그 말 속에는

정 회장의 철학이 담겨 있다.

 

정 회장이 이십 안팎의 나이에 막노동을 할 때도

그랬었겠지만 60~70년대 당시 건설공사장에는

지금처럼 좋은 장비가 없어 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당시 업자도 인부들 또한 선호했던

작업 ‘도급’이 있었다. 업자는 도급을 주면

작업인부들을 감시 감독할 필요가 없고, 작업하는

일꾼들 또한 나름대로 열심히 하면 일찍 끝나

빨리 돌아 갈 수 있어서 꽤 선호했던 방식이다.

 

건설현장에서는 도급으로 하청을 주는 방식을

일본말“하꼬떼기” 또는 “우께도리”라 불렀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노동자 합숙소에서 빈대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빈대에 물리지 않는 방법을 찾다.

침상의 네 다리를 들어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하나씩 놓고 잤다.

 

효과는 100% 그러나 며칠뿐이었다.

빈대가 다시 사람들을 물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침상 위에 누워 자는 사람들을 물려면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지나야만 하는데 그러자면 헤엄을

못 치는 빈대들이 세숫대야 물에 빠져 죽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유심히 살펴본 결과 침상다리를 타고 올라가기가

불가능하다고 느낀 빈대들은 벽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가 천정에서 사람 몸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정 회장은 그때의 놀라움을 평생 잊지 못한다.

 

하물며 빈대도 목적달성을 위하여 저토록 머리 쓰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여 성공하지 않는가..

 

그러니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무슨 일이든 중도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목적을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빈대만도 못한 놈”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정 회장은 훗날 기업을 경영하면서 빈대에게 배웠던

그 기발한 아이디어를 응용하여 숱한 일화를 남겼다.

부하직원을 나무랄 때 그런 말을 쓰게 된 것이다.

 

2. 청개구리 철학

 

고 정주영 회장의 네 번째 가출은

청개구리의 행동을 보고 가출한 것입니다.

 

정주영이 개울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청개구리가 언덕을 뛰어 오르다가

미끄러져 내려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에 정 회장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보았다.

 

청개구리는 10번 이상이나 뛰어올랐으나

또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은 청개구리의 다음 행동이

더욱 궁금하여 이제는 쭈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쳐다보게 되었다.

 

청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20번, 30번, 40번 이상을

넘기고서야 언덕을 뛰어 올라 걸어가는 것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입가에는 빙그레 웃음이 맴 돌았다.

 

청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오르려면 30번 이상은

실패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주영은 청개구리를 보면서 결심하였습니다.

 

<<개구리도 성공하는 데 나는 사람의 자식이다.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라고

결심하고 4번째 마지막 가출을 했습니다.

 

3. 쥐 철학입니다.

 

쥐 철학은 그가 쥐가 달걀을 훔쳐가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쥐 두 마리가 달걀을 훔쳐 가는데,

우선 한 마리가 먼저 달걀을 끌어안고는 발라당

들어 눕자, 다른 한 마리는 달걀을 안은 쥐의

꼬리를 꽉 물고는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목표 달성을 못하면 이는 쥐보다 못한 자이다.”

하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위의 세 가지 철학으로 오늘 날의 현대그룹을

대기업으로 키우는데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 창조적 도전자 아산 정주영 ◆◆

 

나의 성공 100%는 확신 90% 자신감 10%이다.

 

새봄을 기다리며...

 

이 글은 아산 정주영이 1981년 한 일간잡지에 직접

기고한 글로 기업인으로서의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창밖으로 내리는 부드러운 함박눈은 오는

봄을 시새는 것인가.

예로부터 立春(입춘) 지나서 오는 눈은 꽃을

시샘하여 내린다 하여 꽃샘 눈이라고 부른다.

 

초봄의 女神(여신)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마음속에

흐뭇하게 안겨준다.

仁王山(인왕산) 골짜기엔 解氷(해빙)의 물소리가

졸졸 흐르며 삼라만상을 에워싼 대기에는 약동하는

새봄의 기운이 서렸음을 알려준다.

 

춥고 지루하던 겨울은 지나가고 깊고 깊은

겨울밤의 思索(사색)에서 깨어나 긴 기지개를

켜는 봄을 바라본다.

 

이른 봄 먼 곳에서 동경의 女人(여인)이 살며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새봄을

기다리며 仁王山(인왕산) 음지의 殘雪(잔설)에

아쉬움을 보낸다.

 

早春(조춘)의 아침은 상쾌하다.

차갑고 부드러운 바람이 뜰 안에 가득하고 裸木

(나목)을 한 둘레 돌아와서 나의 옷깃을 파고든다.

며칠 사이 확실히 달라진 것이 많다.

 

2월의 이른 봄은 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대답하면서 찾아왔다.

봄을 기다린 사람은 많다.

 

그중에서도 산간농촌 殘雪(잔설) 사이 양지쪽 논두렁에

불을 피워놓고 구정 대보름달을 맞이하는 思春期

(사춘기)의 아이들 마음속에 봄은 맨 먼저 찾아온다.

 

도시의 운동부족인 일과를 다소라도 메우려고

새벽 출근길에 반은 걷고 반은 뛰어가는 사이에도

천지간에 새봄이 찾아들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눈을 밟으며 뛰어가는 운동화 바닥으로 봄을 느낀다.

밟히는 촉감부터 다르다.

봄눈의 감촉은 부드럽고 겨울눈은 이보다 딱딱하다.

 

달려가는 새벽길의 겨드랑이 속으로 스며드는

봄기운은 생명 속의 오염된 찌꺼기를 씻어내는

맑은 냉수와도 같다.

 

새벽녘 景福宮(경복궁)의 중후하고 긴 돌담장 옆을

달리며 아직은 찬 침묵 속이지만 봄의 태동을

곳곳에서 느낀다.

 

早春(조춘)의 감격을 가슴 그득히 들이마시며

아직 밝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서면 봄은 간곳없이 사라진다.

비단 봄뿐이 아니고 모든 節氣(절기)의 변화에 대하여

그 反射感覺(반사감각)은 무디어지고 어린 시절의

먼 감상을 되씹는 일밖에 없다.

 

계절이나 자연은 그때에만 민감할 수 있고

有情(유정)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린 날의 순박한 자연은 어느새 멀리 뇌리에서

사라져버리고 고향을 등진 도시의 流浪民(유랑민)처럼

거북한 긴장 속에서만 살아왔던 일을 되돌아본다.

 

이러한 세월이 제2의 天性(천성)으로 화하여 다년간의

생활감정도 이런 습관에 이어져서 바람직하지

못한 개별의 나를 형성해 놓았다.

 

오늘의 현실은 4·4 分期制(분 기제)의 소득확대 추구를

위한 치열한 적자생존 투쟁으로 채워지는 4계절뿐이다.

 

기업인에게는 歡喜(환희)의 4계절이나 낭만적

4계절은 연분에 닿지 않고 대자연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心情(심정)에 다가서지 않아

멀고 먼 데에 있는 것과 같은 실정이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젊은 계절에 궁핍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굶주림과 헐벗음을 딛고 일어서기 위하여,

그리고 구멍가게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기업인으로서

불안한 첫발을 내디딜 때, 또한 그 일을 기점으로

하여 내 생애의 발목이 잡힌 후 오늘까지 모험과

투쟁 속을 헤쳐 나왔다.

 

나로서 최선을 다하는 그 渾身(혼신)의 집중과

정열과 全心全靈(전심전령)을 消盡(소진)하는

고달픈 질주의 기나긴 행로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편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지는

아니한다. 企業(기업)의 대열에 서 있는 여러 기업

동지들이 이와 같은 형편에 놓여있을 것이다.

 

남이 잘 때 깨고 남이 쉴 때 뛰어가지 않으면

기업의 육성은 불가능하다.

처절하다고 할 만큼 각박한 競合事例(경합사례)들을

수없이 치러내면서 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봄이 와도 봄의 줄 밖에 서서 昏迷(혼미)한

어둠에 몸을 적시고 있는 수가 많다.

경쟁에 이기는 것만이 삶의 전부로 생각해온

폐쇄적 열기에 갇혀 지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봄은 환상 속에만 있는 관용의 女人(여인)과 같다.

 

봄은 만인이 듣는 복음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봄은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온다.

 

춥고 음침한 긴 겨울을 힘겹게 견디어낸

사람들에게 봄은 더욱 따스하다.

살며시 스며드는 봄은 慈愛(자애)의 어머님 같은

성품 그대로이다. 포근하고 훈훈하다.

 

언제나 긴장하고 서두르면서 마음의 안식이라곤

없는 기업인들은 하늘의 별을 딸 듯 한 기세로 달려

가지만 정치가나 공직자 또한 聖職者(성직자)들의

비판 앞에서는 자라목같이 움츠러들기를 잘한다.

 

그 허약한 기업 군상들..

유구한 儒敎(유교)의 사상이 그러했고 士農工商

(사농공상)의 선조들이 실정이 그러했거니와

제 아무리 천만금을 손에 잡은 사람이라도

봄바람에 녹은 殘雪(잔설)과 같은 인간적

허약의 일면을 숨길 수 없다.

 

기업의 사무실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화려한 循環(순환)도 속절없이 스쳐 지나가며 다시

새봄이 와도 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때가 많았다.

 

[ 空地(공지)에 無花草(무화초)하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다. ]

 

기업인들이 봄을 기다리는 건 하늘에 별을 붙이고

돌아오는 여인을 기다리는 바나 다름없이 空疎(공소)한

경우가 되곤 했다. 그런데 봄이 어김없이 또 왔다.

 

仁王山(인왕산)의 잔설을 밟으며 계절의 은혜를

새삼 되뇐다. 봄볕이 하루하루 짙어져 간다.

天地(천지)가 새봄이다.

 

이제부터 기업의 壇下(단하)에서 봄을 만끽하고 싶다.

經濟壇上(경제단상)에서 호기 있게 일하는 연출자들의

화려한 무대를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心情(심정)의

여유를 가지고 이 봄을 즐기리라.

 

봄눈이 녹은 들길과 산길을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위대한 자연을 재음미하고 인정의

모닥불을 피우리라.

天地(천지)의 창조주 앞에 경건한 찬미를 바치리라.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은 여러 가지이다.

온화한 삶과 질풍처럼 달리는 삶이 있으나

窮極(궁극)의 염원은 한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平和(평화)와 행복과 自足(자족)을 느끼는 마음이다.

 

1981년 올해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

마음 깊이 기다려지는 봄이 아주 가까이까지 왔다.

 

 

출처 : 이재권
글쓴이 : 이재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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