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구자관 회장 인터뷰(조선일보)
손이 있다. 직원 8000명에 2008년 매출 1400억 원을 올린 기업 삼구개발의 CEO 구자관(65)의 손이다. 젊은날 공장에서 일하다가 전기톱에 양쪽 손가락이 절반쯤 잘려나가고, 공장을 뒤덮은 화마에 손은 물론 온몸을 덕지덕지 이식한 피부로 장식한 고난의 손이다.
카메라 앞에서 애써 손을 감추며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뭘 하겠다, 좋겠다들 하는데, 나는 절대로 안 돌아간다. 나에게 젊은 시절은 악몽이었다.”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악몽 같은 가난이었지만, 분노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낸 인생. 그래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노력하면 안 되는 일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설파하는 인간 구자관의 감동 스토리.
아이스케키통을 메던 날
1944년 어머니부터 외삼촌, 이모들까지 외가 다섯집에서 몇 달 차이로 아들들이 태어났다. 다섯 형제는 전쟁과 1950년대 전흔을 용케 살아남아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구자관이 말했다. “중학교 입학하던 날, 형제들이 교모에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갔다. 똑같이 초등학교 다녔던 내 어깨에는 아이스케키통이 메여 있었다.” 가난도, 굶주림도 힘들었지만 “중학교 교복 못 입은 것이 그리도 아팠다”고 했다.
학사금 없어서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어
아버지는 선비였다. 양계공장, 고무공장 등등 손을 댄 사업마다 실패했다. 구자관의 7남매는 외갓집으로, 고모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원래 사업을 하면 안 될 분이 사업을 하셨으니 힘든 것도 당연했다.”
결국 월사금을 제때 못낸 구자관에게 초등학교에서는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낮에는 아이스케키통과 구두통, 메밀묵통을 들고 다녔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야학을 다니며 청계천에 솔을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 아버지가 사장이 됐고,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러다 너무너무 공부를 하고 싶어서 서울 용문고등학교 야간학부에 들어갔다.
새벽4시면 깨우던 어머니
구자관은 새벽부터 낮 동안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공장 사장은 학교 가려고 새벽같이 출근한 어린 소년을 “니까짓 게 공부?”하며 뺨따귀를 올려붙이곤 했다. 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책을 읽고 싶었다. 학비 낼 돈도 없는 학생이 무슨 호사라고 책을 읽겠는가. 그래서 하교 후면 동대문에서 미아리 집까지 걸어갔다. 한달 버스비를 모으면 책 한 권을 살 수 있었다. 한달에 한 권씩 단테의 신곡을 읽었고 파우스트를 읽었다.
12시에 돌아와 쓰러져 자는 아들을 어머니는 새벽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깨웠다. 공장 가라고, 가서 얼른 일해서 돈 벌라고. 갑자기 구자관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더니, 눈에서 홍수가 난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게, 그 새벽에 너를 깨우는 게 힘이 들었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굉장히 아팠다.’ 공부가 아니고 일 나가라고 깨우시니. 그런데 그거 안 가면 학교를 못 가니까. 그렇게 당신 맘에 못이 됐던 것 같다.”
아이들아 명심해라, 가훈은 '스스로 해결하자'다
클리넥스로 눈물을 닦으며 그가 말을 잇는다. “자식이 아이스케키 통 메고 나가는데, 다른 형제들 자식들은 다 중학교 교복 입고 나가는데 자기 아들은 메밀묵통, 구두통, 아이스케키통 메고. 그걸 보는 어머니 어떤 심정이셨을지.” 그가 덧붙인다. “감동적인 말로 자식들 가르치진 않으셨지만 참으로 지혜로운 부모님들이셨다”라고.
삶은 그랬다. 공장 다니며 전기톱에 쓸려서 두 손 열 손가락 몽땅 잘려나갈 뻔했던 때도 있었다. 고통? 손가락 없으면 어떻게 돈 버나 하는 걱정이 먼저였다.
공부에 한이 맺혔고, 치부(致富)는커녕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젊은 악몽이었다. 지금도 구자관은 두 아들, 딸에게 이야기한다. “우리집 가훈은 두말할 것 없이 ‘스스로 해결하자’다. 아빠가 그랬고, 너희도 명심해라.”
- ▲ 구자관의 손.
청소용품 공장을 차리다. 그리고 자살 미수
1968년 군대를 갔다 와 보니 그나마 있던 미아리 집도 압류돼 있었다. 청소용 왁스 공장을 차렸다. 입에 풀칠할 정도로 돈을 벌었다. 8년 만에 공장에 불이 났다. 화상으로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구자관은 자동차를 몰고 잠수교로 달려갔다. 오늘은 기어코 죽는다. 그런데 운전 미숙으로 잠수교 위로 튀어 올라 있는 교각을 들이받는 바람에 죽지도 못했다.
그때 이민갔던 형이 귀국해 말했다. 청소용품만 팔지 말고, 미국 한인들처럼 청소를 대행해보지. “그래, 아무도 넘보지 않는 거를 하자. 남들이 천하게 보는 일 청소를 하면 나를 상대할 사람 없을 거 아닌가.” 그리하여 1976년 직원 2명으로 시작한 청소대행업체가 33년 만에 직원 8000명에 연 매출 2000억 원을 넘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이 아는 법
구자관의 삼구개발은 다른 건물, 다른 회사의 청소 및 관리를 대행하는 회사다. 한 마디로 타사의 용역회사다. 경비보안, 환경과 시설 관리도 업무다. 2009년 현재 200여 개사에 총 500여 개 사업장을 용역 관리한다. 이들 사업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정규직이다. 의료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에 가입된 정규직이다.
환경미화원이니 뭐니 하는 직업명이 있지만, 청소하는 사람은 ‘아줌마’와 ‘아저씨’로 통칭된다.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3D. 구자관의 뼈에 맺혀 있는 가난은 이들에 대한 눈을 바꿔놓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줌마’라고 부르는 사람을 그는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생각해보라, 집에서 남편과 자녀들 뒷바라지를 다 해놓고 일터에 가서 남들 하기 싫은 궂은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존경받아야 할 여사님이지 왜 아줌마인가.”
“회사 주인은 직원들. 나 또한 사원일 뿐”
25년 근속한 직원이 승진해 사장이 되자, 그는 뒤로 물러앉으며 명함을 새로 만들었다. ‘대표책임사원’. “회사는 직원들 것이다. 회사에 사장이 있으면 됐지 무슨 회장인가. 나는 이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원 가운데 대표일 뿐이다.” 실제로 이 회사 직원들은 구자관을 찾을 때 “책임사원님” “대표사원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구자관은 그들을 “사원님”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조직의 눈높이를 맞추니 기이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용역업이라는 것이 1년 단위 계약이다. 한 기업의 용역을 맡았다가도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매출이 빠진다. 구자관은 “새로운 계약을 따내면 기존 용역업체 직원을 정직원으로 채용한다”고 했다. 자, 사람은 그대로인데 ‘아줌마’라고 불리다가 ‘여사님’하고 대우가 달라지고 불안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에서 신분 또한 바뀌었다. 그러다보니 업무의 품질이 180도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 계약 업체가 늘어나고 재계약을 하는 업체가 늘어나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 다 구자관처럼 ‘악몽 같은’ 가난을 겪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구자관은 본사에 근무하는 사원들에게 주식 가운데 38%를 나눠줬다. “수고한 사원들이 주인이니 회사 넘보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일찌감치 말해뒀다”고 했다.
나이 예순넷에 오토바이에 입문하다.
구자관이 단호하고 명쾌하게 말했다. “이런 가난은 누구나 가지고 있던 가난이다. 그런데 내가 조금 달랐다고 한다면,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거에 도전한다는 점 정도?”
세월이 흘러 회사도 자리를 잡고, 가난도 추억이 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젊어서부터 평생 장난감 하나 못 가져보고 살았다. 안정도 됐고 돈도 여유가 생겼다. 한번 ‘놀아보고’ 싶었다.
스키를 배우기로 했다. 56세 때였다. 주위에서 “너 뼈 부러지면 붙지도 않는다, 관둬라”고 펄펄 뛰고 말렸다. 지금? 웬만한 스키장에 가면 최상급 코스 ‘직벽’에서 논다. 대신에 무릎 연골이 상해서 수술 두 번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하고 싶었다. 용인대 경찰행정학과에 입학했다. 61세였다. “학교 다니다가 죽을 수도 있는 나이니, 입학식 때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태권도 학점 F 받아서 재수강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싶었다. 2008년 64세였다. 미국에 있던 딸이 날아왔다.
“아빠, 오토바이만은 제발!”
“걱정마라. 내가 말린다고 안 할 사람이냐. 걱정 안 시킬 테니 간여마라."
원동기 시험 합격과 동시에 할리 데이비슨 사서 가죽잠바에 바지, 부츠, 고글, 마스크에 쇠사슬 주렁주렁 달고 타고 다닌다. 동호회 투어링에도 꼬박꼬박 동참한다.
2009년. “노인 문제 연구하고 싶어서” 서강대 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CEO라고 봐주는 과정이 아니라 입학시험 보고, 출석 체크 꼬박꼬박하는 학교다. 서강대 대학원 사상 최고령 석사과정 학생이다.
“졸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거를 놓고 보면, '늦었어' 했으면 어떻게 스키 배우고 대학 가고 바이크 타고 대학원을 다니겠는가.” 자, 구자관 65년 인생의 핵심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늘의 별도 딸 수 있다”
“가장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친구들이 나이 얘기할 때 늘 그런 말 한다. 늦어서 못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늘의 별도 딸 수 있는 게 사람의 능력이다. 내가 쉰 여섯에 스키 배운 게 자랑 아니다. 예순한 살에 대학 간 거 훌륭한 거 아니다. 예순넷에 바이크 탄 거? 훌륭한 일 아니다. 다만 내가 모험적일 뿐, 대단한 거 아니다. 그 때 안했으면 지금 오토바이 옆에 올라가보지도 못하고, 평생 ‘타보고 싶었는데’ 하다 갈 거 아닌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앞으로 뭘 더 도전할지 모른다. 죽으면 어떡해? 인생이 오래 사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탈출구 없어보였던 가난을 뚫고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소년이 존경받는 CEO가 되었다. 미친 짓이라고 남들이 다 말리던 대학교와 대학원, 스키와 오토바이를 예순 줄에 접하게 되었다.
손가락 잘릴 뻔했을 때 포기했으면 불가능했고, 잠수교 교각에 자동차 처박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사내가 지금 하늘의 별을 따겠다고 이야기한다. 도전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도전이라는 게 말이야 쉽지, 어디 누가 함부로 감행할 수 있는 행동인가. 마지막으로 구자관이 말했다.
“내 평생 두 가지 하지 않는 일이 있다. 내세울 거 없이 남부끄러운 사람이니, 몇 년 전 한번 한 이후 ‘강의’는 절대 하지 않는다. 또 주례도 절대 하지 않는다. 주례는 옛날에 화려했고 앞으로 행복할 사람이 하는 거다. 나처럼 불행하고 힘들었던 사람이 주례를 서면 그 부부는 힘들어질 수 있다. 그래서 안한다.”
겸양의 미덕까지 소유했으니, 그를 인터뷰한 짧은 시간이 무척 의미가 깊었다. 마지막에 자리를 일어서며 그가 한마디 더 하며 웃는 것이다. “그런데 내막에 숨겨져 있는 것은, 직원 8000명 가운데 주례를 못 모실 분들이 많다. 그 분들 부탁에 한번 주례 서면 나는 일요일도 없이 계속 그 일 해야 한다. 어떡해? 안 서야지.” 이 솔직한 유머까지 악몽 같은 가난의 열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