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 <4>

김영식구본능하늘 2016. 6. 15. 04:05
평생의 지표, 프란치스칸 영성 얻은 미국 유학




3년 과정의 YMCA 영어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장면은 ‘민족 복음화’의 원대한 꿈을 안고 1920년 10월 2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도쿄에서 아우 장발을 만난 뒤 같은 달 19일 요코하마 항을 출항해 태평양을 건너 한 달이 지난 11월 17일 미국 뉴욕에 도착해,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총장 월쉬 신부를 만났다. 험난한 항해였지만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는 민족을 생각하며 “기필코 ‘기쁜 소식’을 전하리라”는 각오로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월쉬 신부는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머나먼 이국땅에 홀로 서 있던 장면으로서는 하늘 같고 아버지 같은 은인이었다.

▲ 미국 유학 시절 장면. 면.IM1025000024586.eps11



장면은 월쉬 신부의 권유로 1921년 9월 19일 뉴욕 맨해튼 대학에 입학하기 전 6개월 동안 메리놀회에서 운영하는 예비 신학교인 버나드 스쿨에서 영어와 교리, 교양 과목들을 배웠다. 교장 패트릭 번 신부가 직접 가르쳤다. 2년 후 평양지목구 설정 준비위원장으로 한국으로 떠나 결국 6ㆍ25 한국전쟁 때 순교하는 번 주교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장면은 “그때야말로 3년 동안 했다는 내 영어 실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절실히 깨닫고 결사적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 장면이 4년(1921~1925) 동안 공부한 뉴욕 맨해튼 대학 전경.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맨해튼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뒤 1925년 6월 4일 졸업했다. 미국 내에서 교육을 사명으로 하는 유명한 남자 수도회 소속 수사들이 운영하는, 규모는 작지만 내실 있기로 정평이 나 있는 대학이었다. 재학 중 전공과목 외에 종교학, 역사학, 수사학, 철학, 사회학, 대중연설, 물리학과 화학, 영어와 불어 등 선교 활동에 필요한 과목은 거의 이수했다. 특히 필수인 교리는 매일 한 시간씩 배웠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교리ㆍ교회사ㆍ호교론 등을 자습하면서 여러 신부님께 개인 지도를 청해서 거의 무제한 질문으로 신부님들을 괴롭혔다”고 털어놓았다.

윌쉬 신부도 장면의 질문 공세를 수없이 받은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기차 여행길에 나섰다. 장면은 미국 유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수원농림학교에서 개신교 신자 선배로부터 받은 수모를 떠올리며 질문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오해를 풀어 주는 데는 어떤 책이 제일 좋습니까?”

월쉬 신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교부들의 신앙」이면 그만이니 이것을 정독해 보라. 또 「퀘스천 박스」도 매우 좋으니 이 두 책만 철저히 공부하면 대답 못 할 것이 없을 것이다.”

장면은 지체하지 않고 두 권을 구입해 단숨에 탐독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비치는 한 줄기 밝은 빛과도 같은 깨달음이 왔다.

“내가 알고 싶던 모든 의문이 가장 조리 정연하게 해설되어 모든 의문은 깨끗이 무산되고 우리 교리를 명확히 자신 있게 파악할 수 있었다.”

회고록에서 장면은 “이에 따르는 희열과 만족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고 쾌재를 불렀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276쪽).

미국 볼티모어 대교구장 제임스 기본스(1834~1921) 추기경이 1876년 쓴 「교부들의 신앙」은 1960년쯤에 이미 100여 판에 9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전 세계 각국어로 번역돼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불후의 호교론 명저다. 장면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번 주교를 도와 평양지목구 설정을 준비하던 1927년, 2년여에 걸쳐 번역 작업을 마쳤다. 그 즉시 출판하려 했으나 일제의 불허로 1944년에야 외국인 신부 이름으로 겨우 초판 3000부을 발행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연이어 5판까지 2만 부 이상 팔렸다. 원서가 그렇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진리에 목말라 하던 이들의 갈증을 해소했으며, 특히 목사와 장로 등 수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의 개종을 이끌었다. 장면은 교회 일치와 평신도의 사명을 강조하며 진행되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결과를 보완해 6판 출판을 준비했으나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면은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참다운 지식과 진리를 찾는 일에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유학 초기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카푸친 프란치스코회가 사목하던 성 요한 세례자 성당에 다니면서 프란치스코 제3회(재속 제3회)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 노력의 결실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에 푹 빠져 1921년 8월 28일 한국인 최초로 3회에 입회하고, 이듬해 9월 24일 프란치스코를 수도명으로 서약했다. 그에게 프란치스코 영성과 3회원의 사명은 그토록 찾던 참삶의 길로 다가왔다. 1965년 11월에 쓴 ‘성 프란치스코 재속 제3회’라는 글을 통해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해 당시 터득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위대한 성자 프란치스코…, 극단의 가난과 겸손과 고행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문자 그대로 따라 산 복음의 산 표본으로, 속죄의 산 재물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지와 아프리카까지 몸소 또는 제자들을 파견하여 복음 선포를 통한 일대 혁신을 일으킨 희대의 성자, 당시 위기에 빠졌던 교회를 권력 아닌 성덕의 위력으로 구출한 절세의 영웅 프란치스코는… 위대한 관상 시인이며 사회 개혁가였다.”


국권을 빼앗긴 조국을 진정으로 구출할 수 있는 길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에서 찾은 데 이어 구체적인 실천 덕목은 프란치스코 3회 회칙에서 구했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펴낸 「발자취」제4호(1963년 겨울호)에 전국 총회장으로서 쓴 ‘복음 전파는 삼회원의 최대 의무’라는 글은 그가 선종하는 순간까지 실천한 참 신앙인 장면의 삶이기도 했다.

“삼회원은 그리스도의 성 복음을 모범적으로 지키며 자기와 이웃 사람을 성화시킴으로써 천주의 영광을 희구하며…특히 전교 방면에 전력을 기울여 구령(救靈) 사업에 획기적 신기원을 이룩하기 바라는 바이다. 전교 활동이란 반드시 전업적으로 하자기보다 각자가 자기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교면에서 모범적 교우로서의 사명과 열성적 권면으로 하나씩 하나씩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 1937년 12월 25일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장면의 가족 등 지성인 28명이 첫 착복식(입회식)을 갖고 함께 기념 촬영했다. 둘째 줄 세 번째와 네 번째가 장면의 여동생 장정혜와 부인 김옥윤, 다섯째 줄 왼쪽에서 첫 번째와 여섯 번째가 장면(동그란 점선)과 장발이다. 장기빈과 황 루시아, 장발의 부인 서혜련, 시인 정지용과 이동구, 경향신문 사장과 초기 성모병원장을 지낸 한창우와 박병래의 모습도 보인다.




장면은 그렇게 살았다. 스스로 토로한 언어 장벽, 신체 피로 학비 부족 시간 부족의 사중고(四重苦)에 늘 시달리던 유학 생활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도 프란치스칸 영성이었다. 뒤이어 도미 유학 온 장발에게도 권유해 1922년 11월 입회, 이듬해 12월 30일 가브리엘을 수도명으로 서약하도록 했으며, 1937년 12월 25일 한국에서의 첫 입회식 때 부모와 부인 등 가족 모두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되게 했다. 이때 입회한 28명 가운데 20명이 1939년 1월 3일 서약하면서 서울형제회를 결성했으며 장면은 그 자리에서 초대 회장으로 뽑혔다. 1963년 9월 17일 개최된 제2차 전국대회에서는 한국연합회 초대 회장이 된다.

장면은 3회 입회 이후 사회적 신분이 교육자, 저술가, 외교관, 국무총리. 부통령, 내각책임제 하의 국무총리로 바뀌더라도 항상 성의(스카풀라)를 목에 걸고 수도자들과 같은 수덕생활을 평생 실천하며 한국 프란치스코회와 교회 발전의 초석이 된다. 매일 미사 참례는 물론 2주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자녀들에게도 신앙 교육만큼은 철저했다.

아들 장익 주교는 “아버지께서는 목욕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스카풀라를 매고 사셨으며, 다른 모든 일은 우리들이 자율적으로 하도록 맡겨주셨으나 매일 아침저녁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며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신앙생활만큼은 엄격하게 지도하셨습니다” 하고 회상했다. 미국 노트르담 수녀회에 입회해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맏딸 의숙(義淑, 베네딕타, 86) 수녀도 “수도자인 저도 아버지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나의 오랜 수도 생활을 통해 가장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버지의 말씀입니다”라며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 장면의 성 프란치스코 재속 제3회 회원증.



탈장 수술을 받고 요양소에서 몸을 돌보기도 했지만 ‘민족 복음화’를 위한 지식과 프란치스코 영성으로 무장한 장면은 1925년 6월 학업을 마쳤다. 그 무렵 경성대목구로부터 7월 5일 로마에서 거행되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79위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식에 장발과 함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형제는 공부하는 몇 달 동안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여행 경비를 모아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장엄한 시복식에 참석하고 다음 날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한 뒤 40일 동안의 긴 항해 끝에 귀국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알현 자리에서 장면에게 영어로 “네가 지향하는 모든 것에 강복한다”며 축복했다. <계속>

출처 : 주님의 날개 봉평 성당
글쓴이 : 안토니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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