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장준하와 사상계

김영식구본능하늘 2016. 6. 15. 04:00

 


장준하 선생이 어떤분이냐면...

 

 

 

 

 

 

장준하와 사상계



 장준하(張俊河.1918-1975)는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다. 1920년 목사인 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쫓겨 온 가족이 삭주로 이사한다. 장준하는  삭주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가 교목으로 있던 신성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정주(定州) 신안소학교 교사로 3년간 봉직한다. 그 뒤 1941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이듬해 동경 일본신학교로 전학했으며, 1943년 김희숙과 결혼했다. 


 장준하는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국군에 편입된 후 바로 김준엽 등과 함께 충칭(重慶)으로 간다.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었고, 1945년 8월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 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 해방을 맞았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3년 4월 월간〈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문학 부문상을 수상했고, 1967년 3월 야당통합을 위한 4자회담을 주선하여 통합을 이루어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해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했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피임되었다.


 1973년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으며,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된다. 1974년 4월 15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2월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 후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다시 박정희 정권과 맞섰고, 1975년 초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 세력의 단합을 강력히 촉구했다.


 각계에서 그의 호소에 동조하는 성명이 잇따르면서 재야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사 했다. 저서로〈 돌베개 〉가 있다.


 사상계(思想界)는 1953년 4월 1일 창간되어 1970년 5월 1일 통권 205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은 장준하였다. 1955년부터 주간과 편집위원제를 두었다.


 초대 주간은 김성한이 맡아보았고 편집위원으로 홍이섭·정병욱·안병욱·강봉식 등이 참여했다. 집필자들은 대학교수·종교인·언론인·정치인·문인 등이 대부분이었다.


 원래 문교부 산하에 있는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로 발행되었던〈 사상 〉을 속간하려는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나 국민사상연구원의 편집책임자였던 장준하가〈 사상계 〉라는 독자적인 제호로 바꾸어 발행했다.


 창간취지는 6·25 전쟁이 끝날 무렵 정신적·물질적으로 고통 받는 국민을 위해 민족의 앞길을 예비한다는 것이었다. 제1공화국 때부터 독재와 정치악을 철저히 비판한 잡지로 유명하다.


 1959년 2월호에 실린 권두언〈 무엇을 말하랴 ─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 〉는 대표적인 글이다. 1961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 〉가 문제가 되어 발행인이 연행되고 판매봉쇄, 반품공세, 세무사찰, 제작 관계자들에 대한 감시 등의 숱한 고초를 겪었다.


 1962년 8월 장준하가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뒤로 정부의 부정을 더욱 과감하게 알렸다. 독자의 대부분은 대학생·지식인 등이었고, 정기구독자가 1960년대 초 1만 6,000명에 이르렀다.


 1955년 신인상을 제정해 박경수·강용준·이청준·강계순 등의 문인을 배출했다. 그밖에 동인문학상·논문상·번역상 등을 제정해 시상하기도 했다. 1961년 통권 100호 기념호를 펴낸 외에도 여러 차례 특집호를 펴냈다.


 그러나  재정난이 계속되는 와중에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 五賊 〉을 실었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폐간처분을 받았다.


 장준하와 박정희는 역사의 라이벌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출생과 성장배경이 다르고, 인생관 국가관도 크게 달랐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났고,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박정희가 한 살이 많다.


 박정희는 농사꾼 아버지의 6남 2녀 중 막내아들이었고, 장준하는 목사 아버지의 4남 1녀 중 장남이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 공립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장준하는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신안소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일치점이 있다면 식민지 시절 청년기에 3년여 간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교편생활을 하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 군인이 되는 길로 들어섰고, 장준하는 일본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가서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갈림길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박정희는 1940년 봄, 그의 나이 23세 때 느닷없이 교직을 팽개치고 만주로 건너가서 '충직한 일본제국의 군인'이 되는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다.


 장준하는 24세 때 학병을 탈출하여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면서 독립운동가로 나선다. 박정희의 세계관이 권력주의적, 목표지향적이라면 장준하는 민족주의적, 가치지향적이라 하겠다.


 두 사람은 타협을 거부하며 각각 신념의 길을 걸었다. 대결과 대치의 평행선을 계속한 것이다. 그 뒤 장준하는 1975년 의문사로 숨지고, 4년 뒤인 1979년 박정희는 부하의 총격으로 숨졌다.

출처 : 해 인
글쓴이 : 하늬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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