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빛 - (학교에선 안가르쳐주는) 장준하 ③
- 못난 아비 장준하 -
장준하는 가족들에게는 해준 것 없이 짐만 안기도 떠났습니다. 부인은 전셋집을 전전하며 아이 5명을 키웠고 큰아들은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가지 못했죠. 장준하는 박정희의 월남 파병을 앞장서서 반대했지만 결정되고 나서는 큰아들을 제일먼저 월남으로 보냈습니다(큰아들 지못미.ㅠ.ㅠ) 이렇게 장준하는 공사의 구분이 엄격했죠.
1967년 옥중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국회의원이 된 장준하의 아내 김희숙씨에게는 뜻하지 않은 유혹들이 찾아옵니다. 친구들이 자꾸 찾아와 뇌물을 주며 남편 명함하나만 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한 것이죠. 도장 찍힌 국회의원 명함 한 장이면 우리 아들이 일선에서 후방으로 나올 수 있다, 그거 한 장 있으면 집 한 칸이 왔다 갔다 한다, 너도 빚 다 갚고 좋지 않으냐며 유혹을 합니다. 당시 장준하의 집에는 빚쟁이들이 매일 소란피우고 거의 자다시피 했다고 해요. 솔깃한 아내가 집안을 샅샅이 뒤져 명함을 찾는데 한 장도 없는 거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명함 안찍으셨어요?” 물으니 장준하는,
“나 명함 안찍었습니다. 내가 당신이 뭘 하려는지 알지요. 그거 도장 찍어주면 돈 얼마 준다 그거지요? 당신 심정은 알겠으나 미안하오. 내일 아침은 내가 밥 할테니 당신이 국회에 나가시구려.”
이러셨다는 아내 김희숙 할머니의 증언입니다ㅋㅋ(아직 살아계셔요.) 아내는 그저 “죄송합니다~” 했구요^^;;
74년 유신반대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었을 때,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세상에 부끄러운 것 없지만 가족에게는 항상 미안하다고 씁니다. 그리고 큰아들에게 자의든 타의든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장남 장호권씨는 아버지가 매사에 그렇게 엄격했기에 ‘아버지’라고 부르기 보단 ‘선생님’으로 불렀다고 해요. 아버지가 의문사한 뒤에도 그는 기관원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테러를 당하다 해외로 이주합니다. 다 끝났겠지 싶어서 82년에 돌아왔는데 학생운동 배후조종자라는 누명을 쓰고 또 감옥살이를 하죠. 다시 도망쳐 그렇게 외국에서 25년을 살다가 2004년에야 완전히 귀국을 해요. 지금은 정부가 얻어준 임대아파트에서 근근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독립투사,민주화 운동가 후손의 삶이죠. 친일파, 독재자의 후손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아, 그 독재자의 후손이 작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화 운동가 후손 집에 찾아가서 ‘그때 미안했다’고는 했다네요.........ㅎㅎ
대선 앞두고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 여사를 찾아가 정답게 이야기 나누시는 박정희 딸 박근혜.
(장남 장호권씨가 거듭 방문거절하는데도 계속 졸라서, 결국 장호권씨는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방문을 허락했다고 하더군요. 장호권씨는 집을 비우고 없었습니다.)
- 장준하, 의문의 죽음 -
장준하가 죽은 75년 8월 그의 행적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장준하는 평생 미안했다며 부인의 종교인 천주교식으로 결혼식을 다시 올렸고(장준하는 아버지가 목사시니 개신교였죠.), 독립군시절 연을 맺었던 김구 주석과 이범석 장군의 묘에 격식을 갖춘 참배를 했습니다. 장준하는 당시 임시정부의 태극기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윤봉길 의사가 이토히로부미에게 폭탄을 던지러 떠나기 전 결별식 때 썼던 바로 그 태극기죠. 백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기 이틀 전 장준하에게 전해주었구요... 6ㆍ25전쟁통에서도, 광복군시절에 자기가 발행했던 『등불』,『제단』등의 소중한 잡지자료와 일기를 다 분실했지만 이 태극기만은 가슴속에 지니며 지켜냈습니다. 장준하가 평생 지니고 있을 것이라 말했던 태극기를 한 대학교(이화여대)에 기증했던 것도 바로 이 때입니다.
바로 요 태극기.
사상계를 대표하는 또 다른 논객 함석헌,
“75년 7월 말경이었지. 준하가 나에게 왔어. 그리고 하는 말이 어찌 황군장교 하던 사람을 종신대통령으로 모실 수 있겠냐. 도무지 선열을 뵈올 면목이 없다는 게야. 올해는 광복30주년이고 하니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뭔가 합시다, 이런 여운만 남기고 갔어. 그때 난 그 ‘뭔가’가 무엇인지 몰랐지. 그 뒤로 장선생이 한 행동이 오묘해.”
부인 김희숙씨,
“ 뭔가 이상하다, 뭔가 하시려나 보다, 가까워 왔나보다 했죠. 진짜 자기 목숨 내놓았구나. 잘되면 좋지만 안되면...이거 아니면 저거다 생각하셨으니깐 그래, 겨레와 나라에 목숨 바치겠지...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죠.”
장준하는 범 민주세력을 통합함으로써 영구집권을 노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야당의 최고위원까지 오른 정치인으로서는 놀랍게도 군부의 신망까지 얻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그런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유신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범 민주세력의 대대적인 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준하의 생명을 건 마지막 투쟁의 거사일은 75년 8월 18일. 장준하는 바로 하루 전 의혹에 쌓인 죽음을 맞게 됩니다.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은 경기도 포천의 한 야산이었습니다. 등산을 하다가 추락사 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15미터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는 시신을 깨끗했고, 쓰고 있던 안경, 가지고 있던 보온병 등에는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말짱했습니다. 다만 오른쪽 귀 뒤 급소지점에 날카로운 것으로 찔린 듯 한 구멍만 있었을 뿐이었죠. 오른쪽 팔에선 주사 자국이 발견되었고요. 그러니까 정확한 사실만 말한다면,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계곡은 장준하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일 뿐입니다.
더 이상한 것은 죽은 장준하를 처음 발견한 등산객이 경찰에 신고도 하기 전에 이미 경찰에 ‘장준하 선생님이 추락사했으니 확인해서 보고해 달라’는 전화가 걸려 왔었고, 장준하의 집과 동아일보사에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전화가 걸려와 그의 죽음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단 하루 만에 이 사건을 실족사로 처리해버립니다. 6천리를 걸어 독립군에 자원, 온갖 훈련과 산전수전을 다 이겨내신 분이, 게다가 등산이 취미이신 분이, 인근 야산에서 실족사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대균씨,
“70년대라 하면 기본적인 국민의 자유와 정치적인 행동이 모두 제약되는 시기였다.(제발!!! 이시대를 그리워하지 맙시다) 그 시기에 장준하 선생이 아주 유일하게 박정희를 대놓고 욕하는 분이었다. 참 용감한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장준하 선생은 지식인들이나, 재야나, 또는 정치인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식민지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셨고, 50년대, 60년대를 살아오시면서 특별하게 정치적, 사회적인 오점을 남기신 부분이 없는 분이다. 이런 분이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서서 나가시겠다 라고 하는 것은 많은 세력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이 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런데 그런 중심점이 사라졌다 라는 것은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반대의 한 축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김대중 정권 때야 비로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어(이하 의문사위) 장준하 죽음의 의혹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진실을 알아내는 유일한 길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에 있는 자료들을 조사해보는 것이죠. 하지만 국가정보원은 자료를 요청하는 의문사위의 요청에 ‘해당존안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다’ ‘확인결과 요청자료 없음’ ‘발견할 수 없음’이란 답으로 일관해버립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기관이 자료를 내놓지 않으면 청와대로 직접 가져 오라해서 내가 직접 전해주겠다”고까지 말하며 의문사위의 활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바 있으나 노무현 정권 때도 이일은 마무리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이 땅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신 그분께서는 밝혀보려고 시도조차 않하실 게 뻔하니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의문사위 앞에 놓인 장벽은 여전히 높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실을 밝히려고 해도 철저히 숨기고 진상규명을 막는, 대통령보다 더 강한 세력이 누군지 진짜 궁금하지 않습니까....... 대체 누구길래 국정원애들이 대통령보다 그 세력을 더 따르냐구!!!!!!!!!!!!!!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 역사적 인물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온전히 밝혀내는 것이 장준하가 늘 말했든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는 길이며 이 의문사가 규명되는 날 비로소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락처 포천 약사봉 계곡 추모비문 :
‘오오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 평화, 통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이 맨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 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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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한국 현대사의 빛 - 장준하 시리즈는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엔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 - 박정희 시리즈 올려볼게요~ 제가 글 쓰는 방법이,, 까페 글쓰기로 직접 쓰다가 날려먹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어서 한글에 먼저 쓰고 붙여넣기 하는 식이에요... 장준하 1,2,3 은 한꺼번에 써서 나눠서 올린거구요....(가볍게 시작했는데 일요일 하루 다썼다는..ㅠ.ㅠ) 박정희는 아직 안 써놨으니 주말에 써서 담주 쯤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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