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박정희 정일권,정인숙 살인사건

김영식구본능하늘 2015. 9. 16. 22:28

3공화국 3대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정인숙 살인사건

 ...그외에도 많은 사건이 있겠죠... 단지 우리가 모르고 있을뿐.

 

 


 

 

정인숙의 수첩에는 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정일권 국무총리,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 군장성, 다섯개 재벌그룹회장, 장관, 국회의원 등 27명이 연루되었습니다. 정인숙에게 걸린 남성들은 웬만하면 도망쳐야 할 정도로 명성(?)을 떨쳤습니다.박정희공화국의 요정정치가 빚어낸 전국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박정희오까모또 미노루(다까끼 마사오)의 만주국 장교 시절 사진.

1917년 경북 선산출생.

1925년 구미보통학교 입학.
1932년 대구사범입학. 이 해에 일본제국의 괴뢰정권 만주국수립.
1935년 5월 만주수학여행. 일본제국 지배 때 만주견문. 같은 해 김호남과 결혼.

특히 당시 박정희는 성적불량으로 낙제를 겨우 면함. 

1937년 대구사범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부임.
같은 해 큰 딸인 박재옥 출생.
1939년 교직을 떠남.
1940년 만주신경군관학교 입학(혈서지원으로 특혜 입학 허용).
1942년 만주군관학교에 일제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고 일본육사 3년 편입.
1944년 일본육사 졸업 후 만주군 보병 제8단 배속, 중국항일군토벌종사.
1945년 일제패망, 만군이탈, 북경에서 조선인 광복군에 편승,
이 당시부터 친일행적 은폐.

⊙1947년 소위에서 대위로 승진 사관학교 중대장 근무.
⊙1948년 소령진급.10월 여순반란사건 발발,11월 남로당간부사실이 발각되었으나 수사협조(밀고)로

 처형모면하고 석방.

 

 

⊙그 후 6.25전쟁 전까지 육군정보국에 근무하면서 보도연맹원 처리안 기획.

 

이 사실은 미국정보공개에 의한 문서조사에서 드러났다. 월간 ‘말’2001년 5월호에 실린 이도영의 ‘제주도민 예비검속은 이승만 피신을 위한 정지작업’이란 글을 보면 박정희와 김종필은 전쟁 후에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의 주역으로 그 육군본부정보국 작전 과장이었다. 이 사실은 피살자 유족이기도 한 제주도 교사인 이도영의 미국에서 공개된 문서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1950년 박정희 소령지위 회복. 중령진급.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준장으로 진급.
⊙1957년 제7사단장.
⊙1958년 소장진급.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관. 2군 부사령관.
⊙1960년 4-19혁명으로 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과 친일파죄과에 대한 조사 성토로 불안을 느낀 박정희 등

 친일파의 반혁명 음모가 싹틈.

 

 

⊙1961년 군사반란인 5-16 쿠데타를 일으킴.

 


 

 

정일권(丁一權 /中島一權 나카지마 잇켄)

생일::1917년 11월 21일

출생:소련 연해주 니콜리스크(現우수리스크_

사망:1994년 1월 17일(미국 하와이)

복무:1940년 ~ 1957년

특징: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를 졸업( 친일파 )

특징:1940년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 만주군 지린부대 교관에 보임되었다

 

 

국회에서 신민당 의원 조윤형이 정인숙 사건에 대한 풍자 가요를 낭송했을 때는 청와대 안방에서도 이미 그 문제로 '육박전'이 한 차례 크게 벌어진 뒤였다. 육박전이란 육영수와 박정희의 부부싸움을 시중에서 그 성인 '육'과 '박'으로 희화화한 조어.

정인숙이 관계를 맺은 권력자 26명의 이름이 언론에 보도되고 아들의 아버지가 누군지에 관한 풍자 노래가 널리 알려지자 육영수는 참지 못하고 박정희에게 대든다. 사실여부를 따지면서 부부싸움은 험악한 양상으로 비화했다. 박정희는 화가 나서 재떨이를 던졌으며 이것이 육영수의 얼굴에 맞았다. 육영수의 눈자위에 푸른 멍이 든 것을 외부에서 온 여성계 방문객과 청와대 출입기자 일부가 목격했다. 이것이 바깥에 알려지자 '육박전'이라는 풍자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경찰이 정인숙의 집을 뒤져 발견한 수첩과 장부에는 그녀가 관계해 온 것으로 믿어지는 유력인사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거기엔 일시와 장소까지 함께 기록돼 있었다.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경호실장 박종규, 그리고 장·차관과 군 고위장성, 5대 재벌그룹 회장과 거물급 국회의원 등 주요인사 26명을 비롯해서 당시 힘깨나 쓴다는 실력자 수십 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정인숙 수첩에 적힌 이름들이 김지하 담시 '오적'으로





▲김지하 시인(자료사진)



 

바로 그 명단이 김지하의 시상(詩想)을 자극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이 당시 특권층 '오적(五賊)'이었다. 정인숙 사건은 풍자 노래 뿐 아니라 사회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담시와 신문 연재소설에서도 소재가 돼서 꼬리를 물고 파장이 커졌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다.

오적은 당시 권력층의 부패상을 전통적 해학과 풍자로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꽤 긴 시다. 이로 인해 담시라는 독창적인 시 장르가 생기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썩어가는 사회적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담시 오적에 바로 정인숙의 이름이 등장한다.

"… …

또 한 놈이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응승 거리며 나온다

털 투성이 몸둥이에 혁명 공약 휘휘 감고

혁명 공약 모자 쓰고 혁명 공약 배지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 들고 대갈일성, 쭉 째진 배암 혓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은 신악으로! 개조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이닷, 빈농은 이농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사회 정화닷, 정인숙을, 정인숙을 철두철미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 … "


담시 오적은 국회의원을 5·16 쿠데타집단과 동일시한 것 같다. 사회정화를 정인숙 사건처럼 하라는 것은 눈엣 가시같이 굴면 없애버린다는 얘기다. 오적은 특히 개발독재 아래서 권력집단과 특혜 층을 5개 그룹으로 정하고 그들의 행태를 풍자했다.

이들의 한자 표기를 모두 개 견(犬)자가 들어가는 독특한 한자로 써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등장시켰다. 짐승과도 같은 다섯 도적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도둑질대회를 벌이는 것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면서 고대 의인소설처럼 이들을 차례로 풍자해 나간다. 오적이라는 제목은 을사국치조약 때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에서 따 온 것이기도 하다. 다섯 짐승들에 대한 첫 머리 묘사만 들여다 보면 이 담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을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해 입고 돈으로 모자해 쓰고 돈으로 구두해 신고 돈으로 장갑해 끼고



저놈 재조 봐라 저 재벌놈 지조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공무원

풍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 어허 저놈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 한손은 노땡쿠 다른 손은 땡큐땡큐



넷째 놈이 나온다 장성놈이 나온다

키 크기 팔대장성, 제 밑에서 졸개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 엄동설한 막사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 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마지막 놈 나온다

장차관이 나온다

… 추접 무비 눈꼽 낀 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 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 굶더라도 수출, 안팔려도 증산

… "

'오적'이 신민당 기관지 < 민주전선 > 에 재수록되자 문제 커져



담시 오적이 처음 < 사상계 > 1970년 5월호에 실렸을 때만해도 서점에서 이 잡지를 수거하고 시판하지 않는 선에서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신민당의 기관지 < 민주전선 > 에 재수록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민주전선의 압수에 그치지 않고 시인 김지하
, < 사상계 >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이 6월 2일 즉각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 사상계 > 는 그때 휴간했으나 끝내 재발행하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담시 '오적'에 대해 공안당국 뿐아니라 당시 재판부 마저도 "북조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유죄판결의 이유를 설명했다. 과연 그럴까, 재심 청구를 하거나 '역사 재판'을 해봐야 할 일이다. 당시 보수적인 지식인들조차
이 시가 비뚤어져만 가는 시대상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풍자한 가치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표현 자유의 영역 내에 있을 뿐 아니라 해외에 번역을 제대로 해서 널리 읽혔더라면 노벨문학상 감이라는 얘기도 많았다. 김지하는 그 후에도 또 다른 담시 '비어(蜚語)' 등을 지어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상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정권 측은 1974년 7월 그의 시가 "북괴의 선전 활동에 동조한 것"이라며 그에게 반공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적인 김지하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며 문인인 사르트르와 보봐르를 비롯한 많은 세계적 작가들이 석방호소문에 서명했다. 김지하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이는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가장 심각한 문화탄압이었다.

정인숙은 자유당 정권 아래서 대구시 부시장까지 지낸 고위공무원의 딸로 어렸을 적만 해도 유복한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4·19 혁명 후 퇴직당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자신도 대학 입시에서 낙방, 진로가 꼬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장래 희망은 배우와 모델. 그 꿈 때문에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맴돌다가 1963년 시나리오 작가 장사?을 만나 동거생활을 했다.

이들의 동거생활은 순탄하지 못했고 관계가 나빠졌다. 그때 정인숙은 한남동에서 요정을 경영하던 김아무개 마담을 만나게 되고 그후 요정 호스티스의 길로 빠져든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매너로 고급요정의 요화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당시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 드나들던 고급요정 선운각
과 김 마담의 한남동 요정이 그녀의 주 무대였다. 거기서 그녀는 재벌과 권력자들의 노리개감으로 전전했다.

그녀는 죽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그래도 가장 그리운 남자는 장사?이라고 말하곤 했다. 권력자와 재벌의 '성 노예' 노릇을 했지만 어렸을 적 자유롭게 만난 남자가 그녀에겐 가장 사랑에 가까웠다.

 

아들 낳은 정인숙 대통령 선거 1년 앞두고 해외로 내보내





 

 

▲정인숙



 

정인숙은 1968년 6월 아들 정성일을 낳았다. 그녀는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일절 입을 열지 않았으나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와 자주 접촉하는 고위인사들 중 한 명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얘기가 확산돼 갔다. 정인숙은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은 채 "아이의 아빠가 서교동 집을 사주었다"느니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다"면서 주변에 자기 과시를 했다.

이 때문에 아이의 아버지가 대통령 박정희를 가르키는 '고위층'이라는 얘기가 일반화되고 있었다. 이것이 청와대 쪽에 들어갔고 육박전의 이유로 보태지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담당자는 박종규로 돼 있었다. 박정희의 내밀한 행보에는 늘 경호실장인 박종규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정인숙에게서 퍼져나가는 소문이 박정희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헤아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정인숙은 더 이상 서울에 머물러 살 수 없었고 타의에 의한 해외 여행을 떠나야 했다. 고위인사들만이 가졌던 복수여권을 국무총리 정일권의 비서관 신성재가 주선했고 신원조회는 당시 중정부장 김형욱의 비서실장 문학림이 맡았다.

이것은 정인숙 문제가 정일권 혼자 처리한 것이 아니란 증거다. 정일권은 김형욱의 비서실장에게 일을 시킬만한 힘이 없었다.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정인숙은 1969년 3월 도쿄에 다녀왔고 그해 10월엔 워싱턴에 가 그곳에서 한인회장인 노진환의 안내를 받으며 3개월 정도 체류한다. 그녀의 해외 생활은 모두 박종규가 유력자들에게 연락해서 뒤를 돌보아 주었다.

도쿄에서는 박종규와 친한 재일교포 정건영이 정인숙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정건영은 도쿄에서 일본명 마치이 히사와라 불리는 유명한 야쿠자 대부로 긴자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도쿄 최대의 조폭조직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 두목 고다마 요시오의 막료이기도 했다. 이들은 우익 폭력집단으로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살해하는 등 도쿄 암흑가를 지배했다. 그 정건영에게 박종규는 정인숙을 돌보아 주도록 부탁한다.

정건영은 박종규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외환은행 도쿄지점으로부터 수백억 엔 규모의 거액을 대출받았다가 갚지 못하고 부도를 낸다. 그 부도는 고스란히 국책은행인 외환은행이 떠안아야 했고 그것은 국민부담으로 돌아갔다. 박정희 정권 권력자들의 섹스스캔들을 뒤처리하는 비용은 엄청나게 컸다.

정일권, 정성일에게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





▲1991년 2월 28일, 3공화국 당시 한강변에서 의문의 피살체로 발견된 정인숙(당시 26세)씨의 혈육인 정성일(21,미LA거주)씨가 정일권씨가 아버지라는 친자확인 소송을 내기 위해 김포공항에 귀국하고 있다.

 

그녀는 박종규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0년 1월 21일 귀국했다. 그녀가 살해당한 것은 청와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실제로 박정희든 아니든 소문은 계속 그렇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정확히 밝히지 않은 채 애매하게 고위층이라고만 하면서 으스대기까지 했다.워싱턴에 건너간 정인숙은 그곳 한인회장 노진환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다가 다시 서울에 들어가겠다고 요구한다.

1998년 박근혜 의원은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정인숙이 낳은 정성일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때 정 여인(정인숙)과 관련된 당사자를 알고 있었다. 물론 상당한 고위층이었다. 그 사람은 사표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제가 관계했던 여자지만 결코 죽이지는 않았다'고 울면서 사죄했다. 아버지는 그때 그 당사자를 문책하게 되면 그가 살인자로 비쳐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같다." (박근혜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모르거나 모르는척 하거나 둘중 하나

,,정성일은 박정희와 정인숙 사이의 아들  .  정인숙의 죽음엔 박정희가 있다..)

 

한편 성인이 된 정성일은 1991년 6월 5일 서울 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때 모 측에서 그에게 80만 달러를 주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는 1993년 다시 정일권을 상대로 서울 가정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냈으나 소송이 진행되는 중 정일권이 사망함으로써 확인은 영구미제로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정성일은 1993년 SBS < 주병진쇼 > 에 출연해 "최근 정일권씨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국무총리가 모시던 분이라면 말 그대로 대통령 밖에 없다. 정성일은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가 취하한 그의 행태로 미루어 주장에 신빙성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 박정희 아들이 아닐지...그렇지 않다면 죽일 이유가 없지.)

 

누구의 자식일까?... 박정희 아니면 정일권 이겠지.

 

 

보안이 철저했던 박정희의 유락장소 궁정동

 

대통령이 희생된 연회장소라는 것이 오로지 대통령이 여인들과의 유락장소로 이용하던 장소로서 그와 같은 장소는 사고장소 외에도 네 군데나 더 있었고, 이 유락장소는 대통령이 사생활을 즐기던 장소이기 때문에 보안에 철저를 기하였고, 이 점에 관하여는 심지어 청와대경호실 차장 이재전까지도 그 장소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다는 정도이며(수사기관 작성의 이재전에 대한 진술조서 참조) 위 비밀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피고인 김재규 상피고인 박선호, 차지철 및 남효주 등 몇사람의 심부름꾼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오는 빈도는 적어도 월 10회 정도이고 상대하는 여자는 주로 TV 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에 종사하는 처녀들로서 그 수는 적어도 200명이 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임신까지 시켜서 임신중절로 욕을 본 여성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고 하고, 그의 이러한 유락은 심지어 군병원의 현역간호장교들과의 사이에서도 행하여졌다는 것입니다. 10·26 그날 밤과 같이 여자 2인과 남자 3인 또는 4인이 모이는 행사를 대행사라고 하고, 대행사에서 그에게 뽑힌 여성 중 그가 지명하는 여성을 불러 즐기는 일을 소행사라고 한다 함은 그들 사이에는 완전한 공식용어가 되었으며, 대행사는 월2회, 소행사는 최소 월8회 도합 월 10회씩 갖기를 십수 년간에 걸쳐 계속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정인숙 양 사건도 그와 관련된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나는 여동생을 쏘지 않았다” - 정인숙 피살 사건 미스터리 - 
 

 

 

 

 

▲ 방송 : 2010년 3월 20일 (토) 밤11시10분

 

1970년 3월 17일...
40년전의 권총 피살사건 그리고 제3공화국 최대의 스캔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전인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강변로의 승용차에서 권총에 맞아 신음하고 있는 한 사내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아 이미 숨진 한 젊은 여인이 발견되었다. 부상당한 사내는 정종욱(당시 34세), 숨진 미모의 여인은 26살의 정인숙으로 부상당한 정종욱의 여동생으로 밝혀졌다. 그 후, 정인숙의 집에서 발견된 소지품과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녀가 국무총리 등 당대의 정관계 최고 권력층과 염문을 뿌린 것으로 알려지게 되고, 그녀의 숨겨진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냐를 놓고 여러 설이 나돌면서 이 사건은 3공화국 최대의 스캔들로 발전한다. 하지만 며칠 후,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은, 오빠인 정종욱을 범인으로 지목, 누이동생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한다. 정인숙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동생의 문란한 행실을 보다 못한 오빠 정종욱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동생을 죽이고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이다. 사건발생 5일만에 범행을 자백한 정종욱은, 그 자백을 근거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인숙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남겨진 의혹 - “나는 여동생을 쏘지 않았다”


범인이 본인의 범행을 자백하고 형이 확정된 정인숙 사건, 그럼에도 이 사건에 대한 의혹제기가 지난 40년간 계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당시 사건수사가 정인숙 여인 주변에 대해서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오빠의 범행동기가 석연치 않으며, 중요한 범행현장인 사고차량을 사건발생 몇 시간 만에 다른 곳으로 치워버렸으며, 무엇보다 범행도구인 권총조차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여기에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고 난 뒤, 자신은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는 아버지의 회유로 거짓자백 했을 뿐, 집 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숱한 의문점 때문에 정인숙 사건은, 단순 살인사건이라는 수사기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권력기관에 의한 살인’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잠재우지 못한채, 지금까지도 우리 현대사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지난 2월, 제작진이 어렵게 만난 오빠 정종욱은, 억울해서가 아니라면 수감생활까지 다 마치고 나와 “내가 쏘지 않았다”고 얘기하겠냐며, 자신의 결백을 40년이 지난 아직까지 주장하고 있었다. 70대 중반에 들어선 그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지막으로 재심청구를 통해서라도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수사기록 공개 - 의혹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인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정인숙 사건을 둘러싼 의혹과 논란을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 다각도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오빠 정종욱씨와 함께 검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당시 수사기록의 공개를 요청, 현장감식 기록 그리고 피해자 정인숙의 부검기록등을 입수하였다. 제작진은 이를 근거로, 오빠 정종욱을 범인으로 지목하게 만든 결정적인 증거였던 탄도검사와 화약흔 반응 등이 또 다른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은 지 알아보려 한다. 당시 수사기관은 소매 끝에서 나온 화약흔 반응을 근거로, 총을 쏘지 않았다면 오빠의 소매끝에서 화약흔이 나올리 없다며 오빠 정종욱씨의 범행을 확신하였었다. 하지만, 제작팀이 당시 사고차량의 내부와 동일한 크기의 세트를 바탕으로 총기발사 실험을 한 결과, 정종욱씨의 주장처럼 직접 총을 쏘지 않은 상황에서도 화약흔이 검출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것이 알고싶다’는, 제작팀이 찾아 낸 의문의 총기사진을 바탕으로,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는 권총을 둘러싼 의혹을 추적해 나가려고 한다.

 


▲ 2010년 3월 20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 나는 여동생을 쏘지 않았다... 정인숙 피살사건,

 

1970년 3월 17일 통행금지 싸이렌이 울리기 40여분전~ 인적없는 서울 밤거리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한강로변 승용차 안에서 젊은 여성이 총을 맞고 숨진채 발견되었습니다.

 

김해도(전 한국일보 기자. 당시 시경 출입) : 치정이 아니냐. 치정인데 이 정도로 총을 쏘고 이 정도면 일반인은 아니다. 그 상대가...

 

[멘트] 숨진여인은 26살 정인숙 씨... 그런데 사건을 밝히는 과정에서 놀랄만한 일들이 불거졌습니다.


당시에는 거액이 미화 2000달러와 함께 최고위급 정치인 26명의 리스트가 그녀의 수첩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정인숙 씨에게 숨겨진 아들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신상석(전 한국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여러가지 설이 많았고, 정인숙의 행동반경이나 여라가지 정황으로 봐서 이건 상류사회와 얽힌 스캔들 아니냐...

 

3공화국 최대의 스캔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의문과 함께 여인의 죽음이 정치권력과 무관하지 않을거라는 소문이 온 나라안을 뒤 흔들었습니다.

 

김옥선(당시 국회의원) : 정치권의 실력자들, 통치권자들의 부도덕성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그때 사회가 상당히 분노를 하고 여당에서야 덮으려고 갖은 힘을 다...

 

경찰은 당시 차를 운전했던 오빠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주변 수사 조차도 재대로 하지않고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듯한 경찰의 재주에 비해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1970년 5월 19일 국회회의 대정부 질문 중 조윤형(당시 국회의원) 발언 : 왜 수사당국에서는 정 여인의 주변은 조사를 하지않고 정종욱을 단정하는 이유가 뭐냐! 여기에 대해서 저 자신이 의심을 안 가질 수가 없는 것이올시다...

 

하지만 수사결과 총은 운전석에서 쏴 졌고, 정인숙 오빠인 정종욱 씨가 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마져 확인됩니다...


모든 것을 시인하고 형을 선고 받은 정씨... 그런데 20년이 지나 출소한 그의 말은 전혀 달랐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집 앞에서 갑자기 괴한 둘한테 저희가 납치되다시피 해버렸고, 졸지에 권총이 난사 되어서 동생이 거기에서 맞고... 자신도 총을 갖고 있었지만, 동생을 쏜 범인은 따로 있다는 것!


그는 정인숙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동생을 죽인 계획적인 살인범일까?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내가 왜 동생을 그런데서 내가... 내가 왜 살인을 해야됩니까? 난 그게 우리 세상 인간의 윤리 도덕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운전석에서 발사됐다는 총은 누가 쐈을까? 현장에는 제 3의 인물이 있었던걸까? 그리고...

 

 

도준호(전 조선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의문점이 많이 있었지, 그 당시 우선 권총의 행방도 드러나지 않았었고...

 

현장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채 사라져버린 총... 그 진실은 40년속째 미궁속에 있습니다.

 

[진행자] 지난 17일은 정인숙 씨가 피살된지 꼭 4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40년전 죽은 승용차안에선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요? 세간의 역사로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진실이 있는 걸까요?


개통된지 얼마 안되는 강변도로와 당시로써는 아무나 탈 수 없었던 최신식 코로나 승용차~
스물여섯에 아름다운 여인과 권총, 그리고 수많은 권력층에 이름까지 등장하는 이 사건은 당시 모든 신문 사회면에 장식했습니다. 놀랍게도 오빠가 동생을 죽인 범인으로 붙잡혔고... 그 후 40년이 흘러 그에대한 재판과 형집행까지 모두 끝났지만은 어찌된 일 일까요? 19년을 감옥에 있다온 정종욱 씨는 자신은 범인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40년동안 풀리지 않은 그날 밤에 미스테리를 추적해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먼저 당시 경찰은 왜 오빠를 범인으로 지목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멘트] 밤 11시가 훨씬 넘은 시간... 한강변 도로위를 달리던 한 택시 운전사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운전석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도로위로 넘어진 것입니다. 택시운전사가 다가갔을 때 남자는 다리에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했고, 뒤 좌석에는 젊은 여인이 숨져있었습니다.

 

도준호(전 조선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응급환자들 싣는 그게 들어와 있어서 물어보니까 정종욱이라 그래요... 그래서 당신 어떻게 됐느냐 하니까 아~ 내가 괴한한테 총을 맞았다.

 

[멘트]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진 남자는 서른네살에 정종욱 씨... 그런데 허벅지 총상은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던 그와는 달리 차안에서 쓰러진채 발견된 그의 여동생은 숨진상태였습니다.


영어와 일본어를 잘하고, 고급 호텔도 자주 드나들었다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 그 여자는 최고급 요정출신에 스물여섯살 정인숙 씨로 밝혀졌습니다. 사망원인은 가슴과 머리에 맞은 두발의 총입니다. 심장과 폐 그리고 뇌에 돌이킬 수 없는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가슴을 관통한 것으로 보이는 탄환은 차량 뒷좌석 시트에서~ 머리부분을 명중한 또다른 탄환은 차체안에서 발견됐습니다.

 

그런데 탄환의 발사 각도를 분석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분석결과 수사기관은 주요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총이 차에 앞 좌석에서 발사됐다는 것! 그 것은 당시 차를 운전했던 오빠 정종욱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는데 결정적 이유가 됐습니다.

 

김해도(전 한국일보 기자, 당시 시경 출입) : 경찰쪽에서는 오빠가 법인 같다. 오빠가 저질러 놓고 지금 하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가 좀 나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피의자가 계속해서 자기 당했다. 자기는 아니다 뭐 이러고 하니깐...

 

[멘트] 사건당일 그가 입었던 옷과 장갑에서 화약반응도 나왔습니다. 그의 손 주변에 화약이 묻었다는 것만으로도 범행을 입증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경찰은 사건발생 5일만에 정종욱의 자백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합니다.

 

신상석(전 한국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경찰에서는 탄도, 왼쪽 가슴을 맞춘 탄도하고 그 옷에서 화약흔이 나왔다는 것을 근거로 범인으로 지목을 해서 자백을 받아냈다고 그렇게 발표한 것 같습니다.

 

[멘트] 사건이 벌어진 3월 17일 밤 10시 15분... 정인숙이는 오빠 정종욱이 운전하는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타워호텔을 떠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고 합니다.

 

도준호(전 조선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오빠 입장에서 자기 여동생이 그렇게 난잡하게 생활하는게 그걸 사실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가지 복합적으로 정종욱 입장에선 여동생이 집안 망신시킨다...

 

[멘트] 동생의 문란한 사생활을 두고 말다툼이 있었다는 겁니다. 경찰에 따르면 평소 오빠를 고용기사 취급하는 무시하는 동생의 태도에 정종욱 씨는 번번히 모욕과 분노를 느껴왔고, 진작부터 동생을 죽일 생각으로 권총까지 마련해둔 터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밤 11시 20분경... 허교동 집압 골목에서 운전석에 있던 정씨가 동생을 향해 두발에 총을 쐈다는 것입니다.


범행직후 옆구리에 총을 대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총이 불발되면서 심정의 변화를 일으킨 그는 그후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거락(당시 마포경찰서장) : 다시 운전해서 제2한강교 인터체인지를 둘러서 그래서 저기 화력발전소 있는데 그 쪽으로 운전해서 가다가 그 도중에 그 것을 자기가 다리를 보고... 쐈어...

 

[멘트] 경찰 수사발표에 따르면 강변도로에 이르러 정종욱은 다시한번 자신의 허벅지에 총을 겨누어 가벼운 총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기위해서 그랬다는게 경찰측에 설명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들 중에는 이러한 수사발표에 의문을 품는이가 적지않았습니다.

 

김해도(전 한국일보 기자, 당시 시경 출입) : 말다툼으로 시작돼서 우발적으로 화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이거죠! 화가나니까... 그런데 권총을 왜 준비했느냐 이런게 좀 문제였죠!!

 

신상석(전 한국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평소 사생활이 문란하다느 이유만으로 동생을 죽일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죽였더라도 본인의 결단에 의해서 죽였을 것 같지는 않다! 혹시 사주가 있지 않았느냐하는 생각도 들고...

 

[멘트] 사건직후 숨진 정인숙 씨 집에서 발견된 물건들도 논란이 됐습니다. 자유롭게 해외를 드나들 수 있는 회수여권까지 지니고 있었다는 미모의 여인.. 그녀가 소위 최고권력에 정치인들과 깊은 관계였다는 염문이 끊기지 않았습니다.

 

도준호(전 조선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그 당시에 해외를 나간다는 건 상상을 할 수 없었어요. 70년대이니까 그게 거의 해외여권, 여궈늘 갖고 있다는 건 대단한 특권이지...

 

당시 사건 취재 기자 : 높은 사람하고 관계했던 사람이다. 여자다. 이런 이야기...

 

[멘트] 그녀의 수첩에서 발견됐다는 고위 정치인 스물여섯명의 명단과 미화 2천달러 출처에 대한 의혹이 계속됐습니다. 더우기 그녀의 세살배기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누구의 아들이냐는 관심이 집중되었고, 아이의 아버지가 여인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속에 논란은 국회로까지 이어졌습니다.

 

1970년 5월 19일 국회회의 대정부 질문 중 조윤형(당시 국회의원) 발언 : 대학교 축제에서 대학생들이 이 '눈물의 씨앗'을 어떻게 변절해서 지금 노래를 하고 있는고 하니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 할 것 같으면 청와대 미스터 저이라고 말하겠어요.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것을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미스터 정이 누구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고위층과 관계해서 치정에서 일어난 살인이다 하는 생각에서 이 국민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수사당군은 절실히 알아야 하는 것이올시다.

 

[멘트]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왜 그녀의 주변인물들을 전혀 조사하지 않았는지 집중 추궁되는 가운데 심지어 청와대 관련설까지 거론되었습니다.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사건발생 그 이후 어찌된 것인지 정인숙 씨와 관련된 기사는 신문지상에서 그 모습을 감춥니다...

 

신상석(전 한국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사건의 성격상 속보가 계속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현장에서 철수를 했고... 일상취재로 돌아갔거든요~ 세브란스 병원에서 거의 밤샘을 하다가 현장에서 철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철수를 하고...

 

[멘트] 수사과정에서 표기된 의문점도 자연스럽게 잊혀졌갔습니다. 특히 이상한 건 권총의 행방~

 

도준호(전 조선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권총은 발견을 못 했죠! 그 당시 마포서에 수사과장이 최상기라는 양반이 있었는데 마포서 수사과를 중심으로 해서 수색을 했어요... 결국 그랬는데 못 찾았죠!

 

[멘트] 통금을 앞둔시각, 행인도 없는 강변도로에 버렸다는 권총은 끝내 찾지 못했고, 정종욱의 부상을 이유로 사흘뒤 미뤘던 현장검증도 결국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단순 살인사건인 간첩이나 시국사건을 담당한 공안검색에 맡겨진 것도 도한 이래적입니다.

 

 

 

기자들의 접근을 막기위해 정종욱이 입원한 병실 앞에는 경찰과 바리케이트까지 설치되었습니다.

 

신상석(전 한국일보 기자, 당시 사건 취재) : 취재하다 보면 여기저기 옆으로 이렇게 찔러보면 얘기가 나오는데 (이 사건의 경우는) 전혀 안 나와요~ 그렇게 안하고 그냥 와서 브리핑 해준 것만 가지고 우리가 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돼 있어서 철저하게 보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멘트] 그러던 중... 정종욱 씨가 돌연 자백을 하면서 사건은 마무리 되는 듯 싶었습니다. 당시 정종욱 씨 항소심에 대한 재판에 대한 판결문에 따르면 이 사건은 방종을 일삼고 가문을 더럽히는 행위를 뉘우치지 않아온 동생에 대한 오빠의 친족 살인일 뿐이라는 겁니다.

 

김해도(전 한국일보 기자, 당시 시경 출입) : 뭐랄까요... 요란하게 시작했는데 끝은 영 찜찜하고 지금도 이 이야기만 나오면 이런 사건을 이렇게 20년 넘게 사건기자로 현장에서 뛰었는데 이렇게 찜찜하게 종결되는 거는 처음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멘트] 수사문, 판결문 법집행이 모두 끝난 40년전 사건, 그런데 사건당일 병원으로 실려온 정종욱을 만나 이야기까지 했다는 한 기자는 그동안 40년동안 끼고있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습니다.

 

당시 사건 취재 기자 : 목이 막 마르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물을 한 컵 가져다가 목을 축여줬지~ 근데 그 사람이(정종욱) 눈은 감고 있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서워요, 무서워요' 그렇더라구... 내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거,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에요... 왜 그가 무서워, 무서워 했을까? 그걸 (총을) 쏠 정도의 사람이 어째서 자기가 무서워, 무서워 이런 얘기를 했겠느냐! 그건 지금까지도 나한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다는 그런 이야기야~

 

[진행자] 이것이 숨진 정인숙 씨가 타고 있던 차량과 동일한 모델의 차량입니다. 정인숙 씨는 운전석 뒤에서 두발의 총을 맞고 숨졌습니다. 그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수사기관은 국립과학연구소에 감정결과를 근거로 운전석에서 총을 쐈다는 결론을 내렸고, 당시 사고 차량을 운전했던 정인숙 씨 친오빠 정인욱 씨를 범인으로 구속시켰습니다.

 

하지만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숨진 정인숙 씨와 관계된 수많은 정관계 고위층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공안검사가 당시 살인사건을 맡게된 것을 두고도 많은 의혹이 재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종욱 씨는 끝끝내 입을 다문채 법정에서 범행을 순순히 시인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지 40년... 정종욱 씨가 모든 형량을 마치고 출소한지도 20년이 흐른 지금 그는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멘트] 이사건을 취재한지 2주만에 우리는 정종욱 씨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40년전 사건에 비해 그는 몹시 흥분해있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차라리 죽이려면 산속에 가 조용히 죽이든지 집에서 하든지 하지~ 왜 밤중에, 강변도로에서 그렇게 총에 맞고 세상 시끄럽게...

 

[멘트] 자신은 동생이 피살되는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일 뿐... 범인이 아니라는 것! 그러면서도 언론에 나서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데 내가 왜 싫어하겠어요, 솔직히 그런데 하도 세상에 말이야... 너무 당했다고~ 내가 밤에 7시 이후로 외출을 안한 사람이야~ 내가... 하도 당하고 미행당하고...

 

[멘트] 오랜 고민끝에 카메라앞에 선 정종욱 씨... 사건당시 34살이었던 청년은 74에 노인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가 가장 우리한테 찾은 것은 먼저 파주에 한 작은 공원묘지... 그의 발걸음은 작은 무덤앞에 멈춰섰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인숙이라고 그걸 써놓은 걸 다시 금지로 새겼던 거야, 이게... 정인숙, **이 엄마묘 죠...

 

[멘트] 가슴아프게 숨진 정인숙이 아니라 마냥 이뻤던 어린시절 금지로 동생을 기억하고 싶다는 정종욱 씨... 동생의 무덤앞에 그는 고개를 들지못합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내가 잘못해서 고인이 됐는데 생각할 수록 가슴이 아프지 뭐 어떡해...

 

취재진 : 선생님이 잘못하신 것 같으세요?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하여튼 내가 그래도 지켜줬으면 끝까지 잘 지켜야 하는데 못 지켰으니까 그렇겠지 뭐~

 

[멘트]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동생을 죽인게 아니라 동생을 지키지 못한 일이라는 것! 이 일로 최종 판결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그는... 지난 89년 19년 8개월의 긴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정말 억울한 사연이 있었다면~ 그는 왜 법정에서도 그 긴 수감생활에서도 입을 굳게 담을었던 것일까?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가족은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이거에요? 너는 이렇게 고생되고 죽은 동생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 가족은 살아야 안 되겠나 이거예요... 그럼 할 말이 없는 거 아니에요... 그 말이 참 무서운 얘기였어요, 이래서 시작한게 말을 못하게 된 거예요...

 

[멘트] 아버지와 형님이 그를 찾아와 더이상 입을 열지 말라고 말했고, 정씨 자신도 정인숙 씨의 남자... 즉, 고위권력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것이 자신과 가족들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아버지가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법정에서 어떤 얘기가 나올까 싶어서 나를 달래는 거예요... 네가 사형 아니라 무기라도 2~3년이면 나온다. 그러니까 그냥 쉬어 가는 양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가족들 살자, 제발 입 다물어라 내가 뭐라고 그럽니까 거기에서...

 

[멘트] 동생과 관련된 고위층에서 뒤를 봐줄거라는 말을 믿었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공화당 때 정릉 선운각이라고 정치자금 그 하는 비밀 요정이에요... 거기가~ 지금도 엄청난 한옥으로 지어놨는데 거기서 우연히 나는 몰랐는데 어떻게 통했는지 애기를 원해가지고 00이를 임신했는데 낳고 보니 아들 아니에요~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금이야 옥이야 했지요~ 그러다 보니 정이 더 붙어버렸지...

 

[멘트]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사람~ 그 이름을 입밖에 내지 않기위해 그는 누구에게도 진실을 다 말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와 그가 말하는 또다른 진실이란 무얼까요? 취재진은 정종욱 씨와 함께 정인숙 씨가 살던 동네를 찾아가봤습니다.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그 마을을 몇 바뀌나 돌고나서야 정종욱 씨는 자신이 살던 집을 찾았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이제야 찾았어~

 

취재진 : 선생님이 사시던 집은...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이거!

 

취재진 : 아~ 이 빨간집이...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응, 이 창문 있죠?

 

취재진 : 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저 집에서 살았어요, 이 방이 커요!

 

[멘트] 그리고 이내 흔적없이 흘러버린 동생의 집터도 찾았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딱 전등 있는 데... 저기예요!

 

취재진 : 저기요?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네, 여기에 집이 있었어! 그리고 여기 이렇게 안 넓고 이 밑에 약국 하나 있었고... 그 때 여기가 이런 집 아무 것도 없었고 전부 벌판이야~ 벌판이야~! 여기예요, 여기...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돌려서 차를 이렇게 댔었다고...

 

[멘트] 이곳에서 40년전 그날 밤... 동생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누이동생을 죽인이가 자신의 집... 다른 누군가에게 정종욱 씨는 본인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타워호텔을 떠난 차가 신촌을 거쳐서 화교동 집앞에 들어섰을 때 두 명의 남자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서있는 사람들이 다가왔을 때만 해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는 정종욱 씨... 그런 그가 긴장을 풀고 창문을 내린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요만큼 열어 '누구세요' 하니까 '국무총리실에서 왔다'이러는 거예요!

 

[멘트] 동생이 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잘 알고있었던 정씨로써는 그말을 듣는 순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국무총리 심부름 왔다고 그 당시에 그 사람들이 그 시간에 잘 와요~ 또 밤늦게 왔다가... 그 사람들 통행금지 제한을 안 받는 사람들이라서 오면 내가 문 열어 주고 갈 때 배웅해주고 이러니까 특별한 심부름 왔다 나는 그렇게만 생각을 했고...

 

[멘트] 그리고 순간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그는 무슨일이 벌어지는 지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코로나가 차가 작아요. 소형이니까 그냥 갖다 대고 쏘는데 이 뒤에서 총소리가 두 방인가 세방인가 나는데 나로썬 귀가 멍멍하지요...

 

[멘트] 정신을 차렸을 때는 또다른 괴한의 총구가 자신의 옆구리에 겨눠진 상태였고, 동생의 생사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들이 시키는대로 차를 몰아야했다는게 정종욱 씨가 주장하는 당시에 상황입니다. 얼마 후 차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양하대교 부근에 천주교 절두산 성지... 괴한들을 태우고 성지안 공터로 들어섰을 때 어둠속에 서있던 검은 승용차 한대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라이트 불을 켜보니까 까만 지프차가 있더라고... 그래서 아, 여기서 내가 당하는 구나! 나를 살려 내보낼 이유는 없는 거 아니에요!

 

[멘트] 왼팔로 차문의 손잡이를 누르면서 오른손으로 총구를 밀쳤다는 정씨... 또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합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쏜 사람도 내가 죽은 줄 알았겠지 옆구리에 쐈으니까... 그런데 (총을) 미는 순간에 자기도 밀리면서 격발을 해 버렸고...

 

[멘트] 그 뒤 기억나는 것은 다급하게 달아나던 그들의 발자국 소리뿐이라는 겁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오른손으로 엑셀레이터를 누르고 왼손으로 핸들을 잡았고 차를 운전했습니다. 얼마가지 않아 기억은 끊겼다고 했습니다. 정종욱 씨는 자신의 허벅지에 남은 총상의 흉터가 그날의 진실을 말해준다고 주장합니다.

 

취재진 : 상처가...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여기요...

 

[멘트] 총알이 관통한 각도를 볼 때 정씨 스스로 허벅지에 총을 쐈다는 경찰에 주장은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당시 그의 소매에서 검출된 화약은 총을 밀치다 뭍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이래 앉아있다가 문열고 밀려 나가니까 여기에 총구가 들어왔어!

 

취재진 :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나갔다는 거예요?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그러니까 대각으로 이렇게 나간 거지...

 

[멘트] 그런데 정종욱 씨는 수사당시에는 사건 경위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동생과 만나던 고위 정치인의 이름을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앞섰다는 겁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동생 살해혐의로 복역) : 나는 범인 아니다. 강도를 만났다. 나로써는 강도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일권이 심부름 왔다고 해서 문 열어 줬다고 하면 정일권이하고 무슨 관계냐 하면 세상 뒤집어지는 거 아닙니까 정치가... 내가 법정에서도 (1심재판) 사형받으면서도 정일권이가 이 스캔들에 걸렸다는 얘기 안했어요!

 

[진행자] 운전석에 있던 오빠가 총을 쐈다는 경찰 주장과 정체 불명의 괴한이 나타나 창 밖에서 총을 쐈다는 정종욱 씨 주장! 오빠의 주장만으로 당시 법원 판결까지 났던 경찰의 수사결과가 잘못 됐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종욱 씨를 범인으로 확정했던 근거들을 다시한번 짚어보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사건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자료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감정서에는 뒤좌석 등박이를 쏠 때 지나간 총알이 파여진 바탕으로 총을 쏜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분석이 실려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본 차체 후면으로 발사된 총기의 사각은 내각 30~35도 외각 55~60도로 추정이 된다... 다소 어려운 표현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 감정서 어디에도 애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총을 쏜 곳이 운전석이다라는 구체적인 표현은 실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추정한 발사각을 고려해 봤을 때 운전석이 바로 그 위치에 해당한다는게 당시 수사기관에 해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알이 발사된 지점은 어디일까요? 우리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그 진실을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멘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기록에 따르면 정인숙 씨를 쏜 총은 모두 두발... 한발은 왼쪽가슴으로 들어가 심장과 폐를 관통해 오른쪽 옆구리로 빠져나왔고, 또 다른 한발은 왼쪽 귀밑으로 들어가서 뇌를 지나 오른편 목에 밖혀있었다고 합니다.

 

서중석(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부장) : 해부 소견을 종합해 볼 때는 돌아가신 분의 약간 좌측에서 총기를 발사해서 일단 가슴에 관통 총창 1회를 받은 후에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머리, 또 왼쪽에서 목 오른쪽으로 맹관을 형성하는 또 다른 총창을 받았을 것이다...

 

[멘트] 그 중 먼저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탄환은 가슴을 관통한 뒤 뒤좌석까지 뚫고 들어간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당시 국과수사가 밝혀낸 발사 위치는 운전석을 기준으로 30~35도 사이... 그렇다면 당시 수사기관의 해석대로 범인은 운전석에서 총을 쏜 것일까? 우리는 사건당시 정인숙 씨가 타고 있던 코로나 승용차와 동일한 모델에 차량을 구해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국과수에 감정의뢰서를 토대로 화면에 위치를 찾아 표시한뒤 이를 꼭지점으로 잡아서 운전석에서부터 30도와 35도 방향에 적색과 녹색에 레이져 빛을 각각 쏘아 보기로 했습니다.

 

취재진 : 빨간 선이 지금 30도죠?

 

작업자 : 예,

 

취재기자 : 그리고 파란 선이 35도?

 

작업자 : 네, 바깥 선...

 

[멘트] 국과수에 감정대로라면 발사지점은 이 두개의 선을 벗어나지 않아야합니다. 수사기관이 발표대로 운전석에서 총을 쐈다고 가정했을 때 발사 지점은 운전석으로부터 30도, 붉은선과 거의 일치했습니다. 정종욱 씨 주장대로 운전석 문밖에서 총을 쏘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에도 운전석으로부터 35도에 해당하는 녹색 레이져선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경우 모두 국립과학연구소의 감정결과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검기록은 또다른 단서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상태를 보면 총이 얼마만큼 떨어진 곳에서 쏘아졌는지 알 수있다는 것입니다.

 

서중석(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부장) : 의복에 그런 화약이라든지 입자감입, 또는 화약흔적 이런 것들이 전혀없이 그냥 단순하게 사입구로 판단되는 그런 구멍하나만 있었고요, 해부 소견에 보니까 박탈흔이라고 해서 탄환이 들어가기 위해 피부를 약간 마찰시키는 흔적과 사입구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정한 거리에서 쏘는 소위 원사에 합당하죠!

 

[멘트] 정종욱 씨가 주장하는대로 운전석 창문으로 총을 쏠 경우를 제연해 봤습니다. 거리는 적어도 30cm이상 부검 사진과 일치합니다. 정종욱 씨가 운전석에서 쏠 경우는 어떨까? 차체가 좁은 코로나 차안에서도 총과 피해자의 거리는 10cm거리를 넘기기 어려워 보입니다. 정종욱 씨 다리에 총상을 입힌 것은 자해였을까? 피격이었을까? 그 단서를 찾기위해 당시 의료기록을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 총알은 정씨의 오른쪽 허벅지를 대가선으로 관통한 뒤 운전석 문 하단을 뚫고 나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의료기록과 탄원에 대한 감정기록을 살펴본 전문가는 정씨 다리의 상처가 자해보다는 피격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는데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윤성 교수(서울대학교 법의학과) : 보통 자해를 한다면 이 모형 권총을 갖고 설명을 드리면 편하게 쏘는 것이 (권총들고) 이렇게 대서 대개 다리 앞쪽에 오거나 옆쪽에 와도 다리의 상당히 아래쪽을 쏘게 되는데 이거는 중간쯤 해서 이렇게 온 거는 물론 스스로 해서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굉장히 어색합니다.

 

[멘트] 더욱이 허벅지에 남은 총알이 들어왔다 나간 자리에 차문 아래쪽을 연결하는 탄환의 괘적을 볼 때 앉은 상태에서 입은 총상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윤성 교수(서울대학교 법의학과) : 진료기록에 보면 뼈를 다치진 않고 신경 일부가 손상을 받은 것만 봐서는 허벅지 뒤쪽에 눌려 있다고 보기보다는 자유롭게 허벅지 뒷부분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게 낫습니다. 옆구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상태에서 총을 내리면서 벌떡 일어날 때 그 때 발사됐다면 이런 종류의 관통상이 생기는 것은 타당합니다.

 

[멘트] 당시 경찰이 정씨의 범행을 확신하는데는 그의 옷과 장갑에서 나온 화약 반응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총을 쏘지 않았다면 화약반응이 나올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화약이 나왔다면은 범인의 총을 밀쳐내는 과정에서 묻은 것이라고 항변하면 되는데... 총에서 탄환이 발사되는 순간 화약과 금속일부가 뒤로 빠져나오며 총을 쥔 손주변에 뭍게됩니다. 그런데 총을 쏘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화약흔이 검출될 수는 있는 것일까? 우리는 코로나 차량의 내부와 똑같은 크기에 세트를 짓고 경찰과 정씨 양측 주장에 따르는 상황을 재연해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수사내용대로 정씨가 총을 쐈을 경우를 설정해보았습니다.

 

총을 쏘는 정종욱 씨 역할은 사견전문가가 맡아주었습니다. 두발의 총을 쏜뒤 그가 입은 옷에서 화약입자를 체취합니다.

 

대리역할 : 이게 화약이거든요~ 빨간 거 검은 거 보이시죠?

 

취재진 : 검은 가루 같은 거요?

 

대리역할 : 네,

 

[멘트] 70년대 총기 감식을 담당했던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실험할 소매와 장갑은 종이에 따로싸서 보관했습니다. 이번에는 정종욱 씨 주장대로 설정된 상황! 총을 쏘는 괴한은 역시 사격전문가 가...

 

총구를 밀치려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는 역할은 마네킹이 대신했습니다. 과연, 총을 쏘지 않은 마네킹의 소매와 장갑에서도 화약이 검출될 수 있을까? 그러면 70년대 당시 국과수와 국방과학 연구원 내부에서 발간된 책자에 실시된 방법과 동일하게 진행됐습니다. 황산과 지페민 라민을 섞은 화약이 묻은 옷에 떨어뜨리면은 청색반응이 나타나야합니다.

 

전유권(연세대 화공생명공학 연구원) : 질소화합물과의 반응을 보면서 이게 청남색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멘트] 그렇다면 총을 쏘지 않고 밀쳐냈을 뿐이라는 정종욱 씨 옷에서도 화약반응이 나올 수 있을까? 정씨의 역할을 맡았던 마네킹의 오른쪽 장갑에서도 청색 반응이 나왔습니다. 화약이 있다는 겁니다. 총을 쏜 사람의 옷이나 총을 쏘지 않은 사람의 옷 모두 화약반응 양성이 확인된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전문가들은 이같은 검사로는 총격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뿐 총을 쐈는지에 여부를 가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장현(전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총기감식 팀장) : 차안이기 때문에 미연소 화약입자가 날아다니다가 오른쪽으로 떨어질 수 있고, 어느 부위도 떨어질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그 안에서 누가 쐈든 간에 이 안에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이 쐈든 간에 그 화약이 날아다니다가 떨어지니까...

 

[멘트] 일부 언론을 통해 정종욱 씨의 오른쪽 소매끝에서 화약반응이 제일 쉽게 나왔다고 보도하는 것은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취재진 : 지금 감식 결과상으로는 ‘왼쪽 소매보다 오른쪽 소매에서 더 화약 검출이 많이 되었다’라는 감식 결과도 있는 건가요?

 

지장현(전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총기감식 팀장) : 아니에요! 전부 다 양성반응, 그러니까 다 나왔다 그렇게만 나와있어요! 화약이 오른쪽, 왼쪽, 장갑 다 검출됐다고만 나와 있지 얼마 더 나왔다 덜 나왔다 이런 얘기는 없어요...

 

[멘트] 총알이 남긴 흔적들... 그리고 화약이 뭍어있던 소매와 장갑! 40년 전에도 지금도 감정서에 기록된 내용은 변하지 않고... 하지만 그 해석은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진행자] 실험결과 우리는 운전석이 아닌 다른 곳에서 총을 쏘더라도 정인숙 씨 사체에 생긴 탄환의 각도와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당시 수사 내용에는 그가 동생을 죽였는지 그의 말대로 다른 살인범이 있었는지 판단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빠져있습니다. 바로 정인숙 씨를 쏜 권총이 그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정인숙 씨를 피격한거와 같은 45구경 권총입니다. 경찰은 정씨가 동생을 쏘고 자신의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힌 뒤 차창밖으로 총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차안에서도 정씨가 총을 버렸다는 도로변에서도 이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범인이든 이 총기보다 분명한 증거는 없을겁니다. 하지만, 총은 흔적없이 사라져버렸고, 40년이 지나도록 어디에서도 그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이 문제의 권총은 어디로 사라진걸까요?

 

[멘트] 동생 정인숙에 대한 살인혐의등으로 정종욱 씨가 법정에 섰을 때 그 옆에는 또 한명의 피고가 있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 정말 미안한데 이분한테는...

 

[멘트] 그는 정씨가 세들어 살던 집주인 신 모씨... 신씨는 정종욱 씨에게 총을 빌려준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육사출신으로 육군 중령까지 지낸 그가 군에서 나올 때 가져왔다는 45구경 권총은 정씨가 돈을 주고 빌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생 정인숙 씨의 부탁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 이제 서로 문제가 자꾸 생기고 그 나름대로 주위에서 눈치가 이상하니 뭐 별 얘기가 나름대로 돌았겠지요. 그러니까 암만해도 불안하다 오빠... 그래서 미국도 가라하고 불안하다 그래서 그럼 호신용으로라도 뭐라도 하나 가지고 있으면 되겠니 하니까... 그러면 좋지요~

 

[멘트] 정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총만 발견됐어도 문제는 훨씬 간단히 풀렸을 것입니다. 총구 내부에 남은 흔적과 현장에서 수거된 탄환의 고유 흔적을 대조하면 소위 강선흔 검사에서 정씨가 빌린 총이 범행에 쓰였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선흔 : 탄환의 고유 흔적, 이를 통해 특정 총기에서의 발사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음,

 

[멘트] 하지만, 총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정씨가 총을 차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주장하는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도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 (내가 던졌다면) 그 쇠뭉치를 몇 미터를 던지겠습니까? 그 권총을... 그런데 그 강변도로... 한강, 강까지 물속에 들어가서 찾더라 이거예요...

 

[멘트] 권총의 행방을 찾아 300여명의 경찰이 동원돼 도로변과 한강 밑바닥까지 수색하는 장면이 뉴스로 보도된 가운데서도 일각에선 의혹이 터져나왔습니다.

 

21일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해 권총 수색을 벌였던 경찰은 24일에는 아예 수색도 않고 있다. 담당 형사들은 평상 근무에 들어갔고 간부들은 현장검증 후에나 권총수색을 재개할 뜻을 비치고 있다. - 1970년 3월 25일자 한국일보 기사 -

 

[멘트] 그런데 우리는 취재도 중 의외의 사진 한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검찰청 홈페이지에 실린 이 사건에 대한 기사 내용에 권총사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엔 범행에 제공된 권총이라는 설명까지 붙어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정종욱 씨도 수감 중 총에 관한 얘기는 들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 마포경찰서의 형사인가 누가 와서 접견이 안 되는데 수사상 접견이라고 해서 면회장 한번 간 일이 있었어요... 가니까 사복 경찰관이... 나는 누군지 잘 모르지요.. 그 당시에... 권총 하나 내놓고 ‘이 권총 기억나나’이러더라고요... 그래 내가 ‘이 썩을놈의 새끼야~ 지금 누구한테 와서 그 따위 소리하느냐’고 고함을 지르고서 돌아선 그런 일, 딱 한번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그 권총을... 보지도 않은 권총을... 범인이 나를 쏜 권총에 대해 나도 모르는데... 어떤 권총인지 탄피도 못 보고 어떤 권총인지 나도 몰라요, 지금... 범인이 쏜 권총에 대해서 그러면 그걸하나 가지고 와서 이 권총이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얘기하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요~

 

[멘트] 당시에는 범행에 쓰였던 권총을 묻는 줄알고 더이상 듣지 않았다던 정씨! 나중에야 그 것이 차안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총만 찾게 된다면은 전문가들은 재심청구도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김영환 변호사 : 보통은 과거에 유죄가 났던 사건에 관해서 새롭게 무죄를 선고할만한 혹은 또 더 가벼운 죄로 인정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 그럴 때 재심을 청구할 수가 있고요, 이때 증거라고 하면 범행에 사용된 총기나 흉기와 같은 그런 물건도 새로운 증거가 될 수 있고...

 

[멘트] 그렇다면 수사기관은 이 사건과 관련된 총을 찾았던 걸까? 우린 검찰에 공개질의서를 보내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에 출처에 대다물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검찰에서 우리쪽에 연락을 해왔습니다. 수사기록에서 원본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찾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의 제목은 45구경 권총의 모양! 범행과 관련된 총이 아니라 같은 종류에 권총의 사진이 실려있다는 설명입니다.

 

[진행자] 검찰청에서 자료집을 만들 때 누군가 이 사진을 옮기면서 표기를 잘못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단순 실수라는 겁니다. 그런데, 검찰이 원본이라며 제시한 수사기록에 사진과 홈페이지에 실린 사진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수사기록에 없는 탄환이 홈페이지 사진에는 선명하게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 검찰은 자료집을 만들면서 누군가 총기와 탄환을 한장에 담으려 두사진을 합성한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설명일 뿐~ 합성을했다는 탄환의 사진은 미결되어있었고, 보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검찰청 홈페이지에서 발견된 권총사진이 단순히 검찰에서 실수로 올려놓은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총이 발견되었는지 현재로써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지 40년이 지났지만 수사기록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지 않고 검찰청에 영구보존 기록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피의자였던 정종욱 씨 본인의 공개신청에도 불구하고 천여쪽이 넘는다는 수사기록 중 검찰측이 내준 것은 경찰과 검찰에서 작성된 정종욱 씨 본인의 진술서 뿐이었습니다. 검찰측은 증거품에 목록조차 제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정종욱 씨 말대로 그가 정말 범인이 아니라면 서고에서 자고있을 수사기록 중 어딘가에 그 무게를 밝힐 중요한 단서가 숨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검찰의 수사기록 미공개가 아쉬움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종욱 씨 주장대로 정체 불명의 괴한들이 여동생을 죽였다면 그들은 과연 누굴까요? 그리고, 왜 정인숙 씨를 죽이려고 했더 걸까요?

 

[멘트] 정인숙 씨가 정관계 고위층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요정이라 불리던 당시 당대 최고의 요리집이었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 공화당 때 정릉 선운각이라고 정치자금 그 하는 비밀 요정이에요... 거기가~
거기서 우연히 나는 몰랐는데 어떻게 통했는지 김종필 씨가 뭐 소개해줘서 알았다고 그랬는데...

[멘트] 1965년 한일회담을 위해서 특별히 지어진 선운각은 3공화국 정치실태들의 비밀 아지트로 이용되어왔습니다.

 

박태균 교수(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 정책결정 과정 자체가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밀실이나 요정에 모여서 결정을 하는 그런 과정들 때문에 요정정치라는 그런 용어가 나타났고요... 실제로 민주화되기 이전까지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중요한 정책들이 결정되는 그런 예가 많이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멘투] 일종의 종업원인 그녀가 정치인들과 깊은 친분을 맺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요정을 진심으로 택해주던 기한 정치풍톡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 그 당시에는 일본 수상이 온다든지 일본의 고위 누군가 와서 거기서 지낸 그 당시에는 정부에서 거기가서 식사하고 술 먹고 그랬어요... 다른 요정에 안 갔어요, 그리고 갈 자리도 없고 그 당시에... 비밀이니까... 그래서 거기 가면 거기에서 그 팀 여성들이 배당받아서 그 방에 들어가야 해요... 들어가서 거기서 얘기 다 듣고... 그 들은 얘기를 나오면 중앙정보부에서 묻는데요... 가서 이 사람하고는 이 장관하고는 무슨 얘기 했느냐...

 

[멘트] 선운각에서 정여인이 만났던 남자들은 당시 최고의 권력층으로 알려졌습니다. 아이 아버지도 그 곳에서 만났다고 했습니다. 쉬쉬하는 중에도 젊은 여인과 스캔들은 파다하게 퍼졌고... 정치적인 부담이 되게 이르렀다고 합니다.

 

신 을 교수(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당시 박정희 정권이 나름대로 어떠한 장기집권 계획을 분명히 가동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시기다 이렇게 볼 수 있고요...

 

[멘트] 어느날 정인숙 씨는 미국으로 떠나라는 말을 듣습니다. 정종욱 씨에 따르면 미국에는 그녀가 살 집도 마련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취재진 : 동생분이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던 것은 사실인가요?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 사실이죠! 워싱턴 DC에서 2천달러 아파트 계약까지 했다 그랬잖아요, 그 전에 미국 한 번 갔다 왔어요. 동생이 왜 그러냐면 자기 일이 자꾸... 세상에 비밀이란 게 없잖아요. 노출이 되잖아요...

 

[멘트] 하지만 소문을 잠재우러 떠난 미국에서 정인숙 씨는 다시 서울에 귀국했습니다. 외국관계자들까지 참석한 대사관 행사에서 그녀가 아이의 아버지가 청와대에 있다며 과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상정유차 잠시 들어와 있던 정인숙 씨는 출국일을 며칠 앞두고 살해됩니다.

 

신 을 교수(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정권의 핵심관계자와 관계가 되어 있다는 걸 권력의 핵심부가 만일 알게 됐다면 그 때는 정권유지와 혹은 정권의 재획득을 위해서 이 문제를 덮으려고 노력할 순 있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런 의혹을 가질 수 있고, 그리고 그런 소문이 소위 말해서 루머로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것은 제가 볼 때 실체적인 진실을 오히려 더 가릴 수도 있고 오히려 더 증폭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박정희 정권 스스로가 만든 그런 거라고 생각을합니다.

 

[멘트] 정인숙이라는 이름이 다시 언론에 등장한 것은 90년대 초반... 20대 청년이 된 그녀의 아들이 언론에 들어나면서였습니다.

 

1993년 2월 6일 주병진 쇼 : 이번에 모실 분은 친자확인 소송을 낸 정인숙 씨 아들 000입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세요...

 

[멘트] 미국 유학 중이던 그는 당시 아버지를 찾겠다며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주병진 : 00씨 주장하시는 그 분 아버님 만나 보셨습니까?

 

00(정인숙 씨 아들) : 뵙지는 못하고 예의상 보좌관 되는 분한테 제가 처음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한시간이 넘는 긴 통화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밝히고 싶은 얘기는 어떤 이유로든 법정에서도 저의 항소가 충분히 사유가 있다고 판명돼서 기소된 일인만큼 이시점에서는 글쎄요, 좀 더 용기를 내셔서 진실을 밝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메트] 자신이 정인숙 씨 아들임을 세상에 밝히고 죽은 어머니 명예를 되찾고 싶다는 했다는 아들... 하지만, 소송이 다 끝나기도 전 그가 아버지라도 주장하던 사람은 숨졌고... 이제 더이상 아버지를 확인할 기회도 어머니에 죽음을 물을 기회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정종욱 씨 곁에도 남은게 많지않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 아버님 어머님이 같이 모시고... 나는 89년도에 나왔으니까... 여기는 87년도 76년도 돌아가셨지... 못봤지~ 이 바람에 우리는... 가족들은 쑥대밭 되어버리고...

 

 

[멘트] 여동생을 죽인 살인범... 40년동안 그를 따라다닌 꼬리표입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일이 용서를 구하고 마지막 억울함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인데 시간은 많지않습니다.

 

정종욱(정인숙 씨 오빠) : 40년이 넘어도 그 명예는 회복돼야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내 뒤에 이걸 내가 맡기고 가더라도 명예회복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부탁하고 가려고... 한 3년은 걸릴 거예요, 그러면 내가 3년 동안 살면 다행이지만 못 살면 내가 위임장이라도 써놓고 가려고요...

 

[진행자] 정인숙 씨가 두발에 총알에 맞아 26의 나이에 세상을 뜬지 40년... 수사관계자나 목격자 결정적이 증인들 중에도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이 적지않습니다. 오빠 정종욱 씨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기회가 영원히 뭍혀버릴까봐 두렵다고 했습니다.


역사는 흘렀고, 제 3공화국 최고의 스캔들이었던 정인숙 씨 권총 피살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죽음에 석연치 않는 의문들이 생기고 더구나 그것이 권력과 관련된 의혹이라면 더욱더 철저하게 진실을 규명하고 밝히는 것이 국가의 직무라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든 말입니다.

 

출처 : 아코디언 음악 사랑
글쓴이 : 선 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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