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① 출생에서 10·26까지 ② 10·26후 정치입문전까지 ③ 정치 입문~대선후보

김영식구본능하늘 2015. 9. 16. 20:46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22세 퍼스트레이디… "한 인간으로서의 꿈을 던져야 했다"

  • 최재혁 기자
  • 입력 : 2012.08.21 03:02 | 수정 : 2012.08.22 08:07

    [대선후보까지 걸어온 길] ① 출생에서 10·26까지
    유년 시절 - "모래주머니·고무줄·공기놀이 잘해 골목대장 되기 충분"
    대학 시절 - "한쪽서 데모 벌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뿐"
    어머니 죽음 - 프랑스 유학 중 귀국…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
    아버지 죽음 - 國葬 치른 후 피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 빨면서 울어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근대화의 아버지'와 '독재자'라는 양면적 평가를 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그는 1997년 정치에 입문한 뒤 2007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서게 됐다.

    ◇출생과 학창 시절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의 첫딸로 태어났다. 재혼의 박정희는 당시 35세, 초혼인 육영수는 27세였다. 박근혜 가족은 이어 서울 동숭동, 고사북동, 노량진 등의 셋집을 옮겨다니다 1958년 신당동에 있는 대지 100평, 건평 30평의 일본식 단층집으로 이사했다. 박근혜는 1958년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박근혜는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모래주머니놀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세 종목을 두루 잘하면 동네 골목대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골목대장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했다.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박근혜 가족의 청와대 생활이 시작됐지만 박근혜와 동생 근령은 신당동 집에 살던 외할머니 이경령에게 맡겨졌다. 어머니 육영수가 청와대에서 학교까지 자동차로 통학하게 되면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까 염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박근혜 후보가 1960년대 중반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어머니 육영수 여사(맨 왼쪽)를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박 후보, 여동생 근령씨, 남동생 지만씨. /박근혜 후보측 제공
    대통령의 딸로 사는 것에 대해 박근혜는 "혜택을 누린 점도 있겠지만 청와대 생활은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나날"이라고 했다. 성심여중 1학년 때 학교 기숙사에서 지낸 박근혜는 2학년 때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대통령의 딸이 전차를 이용한다는 소문이 파다할 즈음 전차 차장이 성신여중 배지를 단 박근혜에게 "너희 학교에 대통령 딸이 다닌다면서?"라고 꼬치꼬치 물었다. "예쁘게 생겼니", "공부는 잘하니"라는 질문에 시치미를 떼고 "글쎄요", "잘하나 봐요"라고 대답했다고 박근혜는 2007년 자서전에서 밝혔다.

    성심여중 시절 단짝 몇 명이 청와대에 놀러 왔다. 가족실과 박근혜의 방을 둘러본 친구들의 반응은 "뭐야, 공주처럼 꾸며놓고 사는 줄 알았는데…"였다고 한다. 점심 도시락도 잡곡밥에 달걀말이, 콩자반과 깍두기 정도로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자서전에 썼다.

    박근혜는 성심여고를 거쳐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역사학과에 가기를 희망했지만 박근혜는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고 했다. 등하교 때 신촌로터리까지 관용차를 타고 가서 학교까지는 걸어 다녔다. 올 초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한 박근혜는 "대학교 때 본받고 싶은, 선망의 대상인 선배가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박근혜 후보(맨 앞)가 1960년대 말 성심여고 재학 시절 열린 체육대회에서 소프트볼 놀이를 하고 있다. /박근혜 후보 측 제공
    박근혜가 서강대에 재학 중인 1972년 박정희는 '10월유신(維新)'을 추진했다. 대학가에는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근혜는 "한쪽에서는 데모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캠퍼스 안은 평화로웠다",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물러가라"고 데모하다 2학년 때 퇴교당한 과(科) 친구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 들은 박근혜는 어머니에게 부탁해 취직과 복교를 돕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 그리고 10·26

    어머니가 1974년 8·15 경축행사에서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박근혜는 프랑스 유학생활을 접고 급거 귀국했다.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때의 심경을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고 기록했다.

    22세의 박근혜에게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일기, 1974년 11월 10일).

    박근혜 후보(맨 오른쪽)가 1970년 서강대 재학 시절 열린 개교 10주년 행사에서 전자공학과 깃발을 들고 남학생들과 가장행렬을 벌이고 있다. /박근혜 후보 측 제공
    박근혜는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을 나설 때 수행했다. 매일 아버지와의 아침식사 때 박근혜는 조간신문을 읽어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을 물었고 자기 의견을 얘기했다. 주제는 점차 국방·외교로 넓어졌다. 박근혜는 그것을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큰딸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다. 박정희와 카터는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 인권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이때 박근혜는 카터의 부인 로잘린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위협과 한국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로잘린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나눈 대화를 남편에게 전달해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박근혜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옷을 갖춰 입고 나간 박근혜에게 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고 했다. 그 순간 박근혜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했다. 김계원에게 저격 당시 상황을 간단히 들은 박근혜는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김계원은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고 답했다.

    박근혜 후보(왼쪽에서 둘째)가 지난 1979년 4월 부친인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함께 육사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생들과 악수하고 있다.
    장례식은 9일간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박근혜는 청와대 대접견실에 마련된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았다. 박근혜는 당시를 돌아보며 "이유 없이 팔다리가 부서질 듯 아파 상복을 걷어봤더니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큰 멍자국이 팔과 어깨, 다리까지 뒤덮었다"고 했다. 청와대 의무실 의사는 "갑자기 너무 큰 충격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면 피가 몰려 이런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박근혜는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 1979년 11월 27세의 박근혜는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트렁크 6개가 이삿짐 전부였다. 박근혜는 "그때부터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 되어야 했다"고 했다.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고독의 세월 18년(1979~1997)… "정치와 무관했지만 뉴스 꼭 챙겨봐"

  • 김봉기 기자
  • 입력 : 2012.08.22 03:01

    [대선후보까지 걸어온 길] ② 10·26후 정치입문전까지
    신당동 집으로 - "첩첩산중 버려진 듯 막막하고 외로워"
    5공화국 시절 - 아버지 격하운동에 "피가 거꾸로 솟아"
    40代 시절 - "조용히 사는 인생 만족스러웠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1979년 10·26 사태로 청와대를 떠났을 때부터 1997년 12월 정치입문 전까지의 18년 기간을 '외롭고 긴 항해'(2007년 자서전)라고 했다. 그는 그럼에도 "그 시절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난 쓴웃음만 나온다"며 "그때도 난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가장(家長) 박근혜

    박근혜는 두 동생 근령·지만과 1979년 11월 21일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옮겼다. 만 27세였다. 옛집에 15년 11개월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는 당시 심정을 자서전에서 "첩첩산중에 버려진 심정이 이렇게 막막하고 외로울까 싶었다"라고 적었다. "밥 먹는 것도 곤혹이었다.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져서 넘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지 동생들도 점점 말을 잃어갔다"고 했다. 심리적 스트레스 때문인지 온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반점이 번져 고생했다. 박근혜는 집 거실에 있던 아버지의 낡은 책상에 앉아 하루에 수백 통씩 날아오는 아버지 추모 편지에 답장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근령의 이혼과 지만의 마약 복용 문제에 대해 박근혜는 한 측근에게 "부모 두 분을 다 총탄에 잃은 상황에서 방황하는 내 동생들이 어떻게 보면 정상적이고, 오히려 내가 비정상적인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후보가 1990년대 초 충남 삽교천 방조제를 찾아갔을 때 모습. 박 후보는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전국 곳곳을 여행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박근혜 후보 측 제공
    박근혜는 1982년 8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신당동 집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유품들을 보관하기엔 비좁았는데, 마침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신 회장이 '유품들을 보관할 장소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집을 줬다고 한다. 한때 신 회장과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박 후보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 나와 관계없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관계가 있으신 분"이라며 부인했다.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이 벌어졌다. 박근혜는 "정인숙 사건 등 가십성 기사를 접했을 땐 (화가 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실명 주장 중에도 사실 아닌 게 많은데, 당시 L·K·P씨 등 익명 증언이 허다했다"고 했다. 아버지 묘소를 자주 찾아가 "하루빨리 왜곡이 바로잡히는 날이 오게 해달라. 적어도 그런 인식을 바로잡는 데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며 기도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가까웠던 인사들도 등을 돌렸다. 박근혜는 5공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유신 때는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떠들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걸 보니 인생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일수록 더 그런 것 같았다"고 했다. 하루는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장관을 했던 한 인사를 마주쳐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 인사는 알은체하기는커녕 박근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인들은 박근혜한테 "차라리 외국에 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박근혜는 거절했다.

    박근혜는 당시 일기(1981.3.2)에서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라고 적었다. "그런 생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1992.5.21 일기)고 했다.

    ◇박정희 기념사업 시작

    박근혜는 5공 시절 영남대재단 이사(1980~1988년), 육영재단 이사장(1982~1990년)을 맡았고, 5공이 끝난 뒤에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1993년~), 정수장학회 이사장(1994~2005년), 한국문인협회 회원(1994년~) 등으로 활동했다. 박근혜는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남긴 육영재단에 애착이 많았다.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안에 근화원과 목련정, 영해루 등 한국 전통 양식집을 지어 놓고 유치원생과 청소년들에게 우리 전통과 생활 예절을 가르치도록 했다.

    박근혜 후보가 1980년대 중반 육영재단 사무실 근처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사진 왼쪽), 박 후보가 1980년대 말 자신의 사무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전에 그렸던 유화 등을 살펴보고 있다(사진 오른쪽). /박근혜 후보 측 제공

    5공이 끝난 후 아버지의 명예 회복 운동을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 10주기인 1989년을 1년 앞둔 1988년부터 TV·신문·잡지 등과 인터뷰를 했다. 1988년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를 발족했고 1989년엔 근화봉사단을 조직했다.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위해 '겨레의 지도자'라는 책을 냈고, '조국의 등불'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10주기 행사를 성대히 치른 박근혜는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1989.12.30)라고 일기에 적었다.

    박근혜는 40대로 접어들면서 정치권으로부터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조용히 사는 인생이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 나는 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늘 신문과 뉴스를 꼬박꼬박 챙겨 보며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과 걱정의 끈을 놓지 못했다"고 했다.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원칙·不通 두 이미지의 승부사… 보수정당 위기때마다 등판
  • 권대열 기자
  • 입력 : 2012.08.23 01:30

    [대선후보까지 걸어온 길] [③ 정치 입문~대선후보]
    정치 입문 - "외환 위기로 지난 세대의 업적이 물거품될까 걱정"
    한나라 탈당 - 지지율 20%→1%로 떨어지고 정몽준과 연대도 불발
    소방수 역할 - 2004년 총선 앞두고 소장파의 分黨論에 "안 된다"
    2006년 6월까지 2년3개월간 모든 선거 승리 이끌어
    실패·재기 - 2007년 패배 딛고… 黨名 바꾸며 정권 재창출 의지

    박근혜 후보가 지난 1998년 4·2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뒤 기뻐하고 있다. /이재우 기자 jw-lee@chosun.com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1997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지원하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지난 15년간 보수 정당이 크고 작은 선거에서 위기를 맞을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선거의 여왕'이지만 '대선의 여왕'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는 원칙과 불통, 두 이미지를 가진 승부사다.

    탈당 그리고 '소방수'

    박근혜는 10·26 이후 "보통사람으로 살고 싶다"며 정치를 멀리하고 서울 양재동 테니스코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3주 남겨둔 시점에서 이회창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선친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박근혜는 자서전에서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 박근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유세에 나서 DJP 연대에 대해 "김종필 총재가 김대중씨를 미는 처세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비난했다.

    박근혜는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 한나라당 부총재가 된 박근혜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탈당했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20% 안팎을 넘나들며 2~3위로 뛰어올랐고 "박근혜가 대권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민주당 내 호남 세력과 영남권의 반(反)이회창 세력, 충청지역 정치권 등을 포함한 '박근혜 중심 정계 개편론'도 솔솔 피어났다. 탈당 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던 박근혜는 '조건이 맞으면 (그런 연대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해 5월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도 만났다.

    그러나 노무현·정몽준이 인기몰이를 하면서 6월 이후 박근혜 지지율은 1% 안팎으로 떨어졌다. 정몽준 의원과 연대하는 방안도 논의됐지만 결국 불발됐다. 박근혜가 처음엔 연대에 적극적이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의인(義人)'이라며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가 정몽준 캠프에 참여한 이유 등으로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왼쪽)박 후보는 2002년 5월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이었을 당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났다, 박 후보가 지난 2004년 3월 당사를 임시 천막으로 옮기기 위해 기존 당사에 있던 당 현판을 당직자들과 떼어내는 모습.
    박근혜는 대선을 한 달 앞두고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내가 요구했던 정당 개혁안이 모두 한나라당에서 받아들여졌고, 나라를 위해서라도 이 후보를 다시 한 번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박근혜는 그해 11월 이 후보 측으로부터 2억원을 받은 것이 후일 대선자금 수사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정가에선 "박근혜가 복당 대가로 한국미래연합의 부채 해결을 요구했다"는 말이 있었다. 박근혜는 그러나 "대선 지원 유세를 위한 당의 공식 지원 활동비였지 복당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다시 패배한 뒤 박근혜는 2004년 총선을 앞두고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남경필 의원 등 수도권 소장파와 영남 개혁 성향 의원들이 총선 승리를 위해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박근혜를 대표로 밀어 당선시켰다. 이들은 총선을 앞두고 분당(分黨)까지 검토했지만 박근혜 후보가 "분당은 안 된다"고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근혜는 '차떼기'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50석도 힘들다"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 정신을 발판으로 121석을 얻어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그는 2년 3개월 동안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여당 대표 8명을 갈아치웠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선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그는 "대전은요?"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알려지고 선거운동 마지막 날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시 유세에 나서며 호남·제주를 뺀 모든 시·도에서 단체장과 의회를 휩쓸었다.

    2007년 대선 도전 실패와 재기

    당심(黨心)을 장악한 박근혜는 2007년 대선 도전에 나섰으나 샐러리맨 신화와 청계천 건설을 바탕으로 경제 살리기를 내세운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민심'에서 뒤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수도 이전 반대 투쟁'을 발판 삼아 보수층에서 박근혜의 지지 기반을 흡수해 갔다. 결국 2007년 8월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는 고배를 마셨다. 박근혜는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왼쪽)박 후보가 지난 2006년 5월 지방선거 당시 서울 신촌 유세에서 얼굴에 ‘커터 칼’ 테러를 당한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모습, 박 후보가 지난 2007년 8월 20일 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한 뒤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명박 후보와 악수하고 있다. /새누리당,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경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이명박·박근혜 두 진영의 대립은 계속됐다. 이 대통령이 박근혜를 "국정의 동반자로 대우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당 운영은 친이계가 독점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 직후인 12월 29일 단독 회동에서 박근혜에게 "입각해서 같이 일하자"고 사실상 국무총리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당에 남아서 일하겠다"고 했다. 2008년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 주요 인사들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공천심사위 구성 과정에서 탈당 움직임이 있던 친박계를 설득하기 위해 박근혜 생일(2월 2일)을 전후해 몇 가지 약속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 지역구는 친박계로 교체한다' '친박 측이 절대 교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교체하지 않는다' 등이 골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친박 핵심 김무성 의원 등이 공천에서 탈락하자 박근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의 인기를 업고 '친박연대'라는 정당이 만들어져 14석을 얻기도 했다.

    이 대통령과 박근혜의 갈등은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박근혜는 "당론으로 (수정안을) 확정해도 나는 수용하지 못한다"며 정면으로 정권과 대립했다. 그는 정치 시작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반대 연설까지 하고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두 사람은 2010년 8월에 만나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동 노력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박근혜는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친이계 물갈이 공천 등을 통해 총선에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면서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를 예약했다.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두 번째 도전 박근혜… 처음 넘어야 할 山은 '가족과 주변'

  • 선정민 기자
  • 입력 : 2012.08.21 03:01 | 수정 : 2012.08.21 03:14

    [대선후보로서 해결할 문제] ① 가족들 문제
    동생 지만씨, EG 소유… 野 "아무 노력 없이 얻은 특권 아니냐"
    올케, 저축銀 고문변호사… 野 "부부가 같이 로비 연루 의혹"

    박지만씨 1000억대 재산가 - 1989년 박태준 명예회장이
    EG전신 삼양산업 부사장 맡겨 김우중씨에 9억 빌려 지분인수
    野 "朴후보가 지만씨 감싸며 경제민주화 주장하는 건 모순"

    올케 서향희 변호사 - 2009년부터 2년 동안
    삼화저축은행 고문변호사… 지만씨도 명예회장과 친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는 근령(58)·지만(54) 등 친동생이 두 명있다. 박 후보와 두 동생 간의 관계는 그동안 굴곡이 있었고 두 동생에겐 구설수가 따라 다녔다. 야당은 이들에게도 검증공세를 펼 태세다.

    박지만씨는 1981년 육사를 졸업하고 1986년 대위로 제대했다. 31세 때인 1989년 히로뽕 투약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이후 2003년까지 모두 6번 마약 관련 혐의로 입건·구속기소됐다. 그는 2004년 12월 서향희 변호사(38)와 결혼한 뒤 생활의 안정을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야권에선 지만씨 부부의 저축은행 로비 연루 의혹 등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지만씨, 1000억대 재산가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당시 포항제철 회장)은 1989년 지만씨에게 EG의 전신인 삼양산업 부사장직을 맡겼다. 당시 지만씨는 대위 예편 이후 마약에 손댔다 풀려난 직후였다. 삼화전자와 포항제철이 각각 50%씩 투자한 삼양산업은 포스코의 냉연강판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독점 공급받아 전자용 산화철을 만드는 알짜 사업체였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지난 2006년 8월 15일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 32주기 행사에 참석했을 때 모습. 박 후보 왼쪽부터 남동생 지만씨와 부인 서향희 변호사, 여동생 근령씨다. /이진한 기자

    지만씨는 부사장직을 맡은 다음 해인 1990년 2월 대표이사가 됐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으로부터 9억원을 빌려 이 회사 지분 74.3%를 인수하면서 대주주가 됐다. 지만씨는 이후 몇 차례 지분을 매각했다. 2010년 말 주식 30만·20만주를 각각 74·56차례에 걸쳐 조금씩 나눠 팔았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통상 기업 대주주의 주식 매도는 가격과 물량을 정해놓고 특정인에게 일괄 매각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며 지분을 조금씩 나눠 파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했다. 또 당시 지만씨가 주식을 매도하기 직전인 2010년 9월부터 EG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규제로 호재를 얻어 '희귀 금속 테마주'로 떠오른 상태였다. 지만씨는 앞서 2007년 말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26만주를 장내 매도했다.

    한국거래소는 지난 1월 EG를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했다. 한국거래소는 "EG의 주가가 급변한 데 대해 조회공시를 요구했으나, EG가 '특별한 사유가 없다'고 한 뒤 자사주를 매각하는 결정을 공시해 관련 규정을 위반했다"고 했다.

    현재 이 회사의 회장인 지만씨는 특수관계인 2명과 함께 주식 216만5323주(28.87%)를 갖고 있다. 20일 종가 기준으로 1318억원에 해당한다. 박 후보를 비판하는 쪽에선 "지만씨는 마약 복용 혐의로 6번 입건·기소되는 등 회사 경영에 별다른 공헌도 못 했는데 이런 알짜 회사를 소유한 것은 특혜 아니냐"면서 "박 후보는 지만씨를 매번 감싸기만 했는데 그러면서 경제 민주화를 말하는 건 모순"이라고 하고 있다.

    야권은 마약에 빠져 생활하던 지만씨가 박태준 회장으로부터 EG라는 회사를 받게 된 것이 특혜는 아닌지,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된 경영을 하며 재산을 불린 것인지를 쟁점으로 삼을 태세다.

    박 후보의 올케 서향희 변호사

    서향희 변호사는 전북 익산 출신으로 부산 중앙여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했다. 박 후보는 2005년 9월 지만씨 부부가 득남했을 때 "부모님이 계셨다면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셨을 텐데…"라고 했다.

    그러나 야권에선 이런 박 후보의 관심을 서 변호사가 '사회적 영향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 변호사는 인선이엔티·케이엠에이씨 등 회사의 법률 자문과 사외이사를 맡았고,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공제조합, 전국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 공제조합 서울지부, 한국건설자원협회 등에서 법률 고문과 운영위원 등도 맡았다. 그가 법률 자문을 맡은 회사는 주가가 일시적으로 뛰고, 자문을 그만둔 뒤에는 주가가 하락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서 변호사는 2009년부터 대전고검장을 지낸 이건개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 주원의 공동 대표로 활동하다, 2011년에 법무법인 새빛을 설립해 현재 공동 대표 변호사로 있다. 야당은 서 변호사가 삼화저축은행 고문 변호사(2009~2011년)를 지냈고, 지만씨가 신삼길(구속 기소)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과 절친한 사이였던 점을 들어 "저축은행 로비에 관련된 의혹도 있다"고 주장했다. 서 변호사는 최근 아들(7)과 홍콩에서 한 달 동안 지내다 귀국했다. 서 변호사는 법무법인 대표를 그만둘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결혼 6번'한 사이비교주 최태민, 박근혜와는 어떤 관계?

  • 김시현 기자
  • 입력 : 2012.08.22 03:01 | 수정 : 2012.08.22 10:02

    대선후보로서 해결할 문제 ② 최태민씨 의혹
    최씨는 어떤 사람 - 경찰→승려→중학교 교장, 사이비 교주로도 활동, 이름 7개에 결혼도 6차례
    朴후보와 어떤 관계 - 육영수 여사 사망 계기로 인연 "박근혜 이름 팔아 이권 개입"
    70년대말 中情 조사 받기도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를 검증할 때 빠지지 않고 제기되는 의혹은 1970년대 말 박근혜와 함께 대한구국봉사단을 운영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1912~1994) 문제다.

    ◇최태민은 누구?

    중앙정보부는 1970년대 말 최씨를 조사했다. 중정의 수사자료로 알려진 문건에는 "박근혜의 후원으로 구국봉사단을 설립, 매사 박근혜 명의를 팔아 이권 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의 금품을 징수했다" "롯데, 신라호텔 등을 무대로 매일같이 정·관·재·언론계 등 중진인사와 접촉, 초호화판으로 행세하면서 이권개입, 금품수수를 하고 엽색(獵色) 행각으로 물의를 야기했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공사 수주, 장군 승진, 국회의원 공천 명목으로 돈을 받고 공금을 빼돌려 차명계좌로 세탁하는 등 총 44건 3억1755만여원의 비리 항목이 적시돼 있다. 별도로 12건의 여자관계도 있다.

    최씨의 딸 최순실씨는 2007년 한나라당 검증 청문회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우리 집을 덮쳐 온 집안을 샅샅이 수색했으며, 심지어 장독의 고추장까지 파내 수색했다"며 "당시 중정 조사가 시작될 때 아버지는 위출혈과 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우면서 아버지를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했다. 만일 아버지(최태민)가 그런 죄를 저질렀다면 감옥에 보냈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씨는 1979년 10·26사태 후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의 지시로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로 보내졌다.

    최씨는 일제강점기 전후 경찰공무원으로 활동하다 육군 헌병대 문관으로도 근무했고(1949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는가 하면(1954년) 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도 취임했다. 그 뒤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사이비종교인 '영생교'를 만들고 교주로도 활동했다. 박근혜를 만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름을 7개 가졌으며 결혼도 6차례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3월 16일 새마음 궐기대회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퍼스트레이디 대리(가운데)가 최태민 당시 구국봉사단 총재(맨 오른쪽)의 안내로 걸스카우트 대원들을 돌아보며 격려하는 모습.
    ◇박근혜와 최태민은 어떤 관계?

    최씨를 수사한 당시 중앙정보부의 수사자료에 따르면,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3차에 걸쳐 꿈에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는 현몽(現夢·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남)이 있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발송, 1975년 3월 6일 박근혜와 접견했다"고 돼 있다. 당시 최씨는 63세였다. 박 후보는 지난 2007년 검증 청문회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 수많은 위로 편지와 전화를 받았다. 그 내용이 상당히 마음에 와 닿고, 만나서 얘기 듣고 싶을 때 만났다. 최씨는 그렇게 해서 만난 몇 분 중 한 분"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중·후반 신문을 보면, 박근혜와 최씨가 함께 행사에 참여한 사진과 기사들을 볼 수 있다. 최태민은 1975년 5월 임진강에서 구국기도회를 개최했고, 이 자리에 참석한 박 후보가 대한구국선교단의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선교단은 이후 대한구국봉사단(1976년), 새마음봉사단(1978년)으로 이름을 바꿨고, 박근혜와 최씨는 각각 명예총재와 총재로 활동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을 지냈던 선우련씨의 1977년 9월 20일자 비망록에 따르면, "9월 12일 밤 대통령은 근혜양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및 백광현 정보부7국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구국봉사단 최태민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친국(親鞫)을 했다. 대통령은 근혜양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를 거세(去勢)하고, 최씨를 청와대 근처에는 얼씬 못하게 하고,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라는 세 가지 지시를 했다"고 돼 있다.

    최씨는 그러나 박근혜가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이사장을 맡은 육영재단의 고문을 지냈다. 1990년에 근령·지만씨가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최태민 목사로부터 언니(누나)를 구출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최씨는 박근혜의 강남구 삼성동 자택에서 500m 떨어진 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지난 2007년 언론 인터뷰에서 "알지 못한다"고 했다. 최씨의 딸 순실씨는 2007년 검증 청문회 때 "그렇다는 얘기를 듣고 알아 보니 수㎞ 떨어져 있었다. 박 후보는 저희 집 위치를 알지 못하며, 서로 내왕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박근혜는 2007년 검증 청문회에서 최씨에 대해 "누군가를 만나 일을 할 때 결혼 몇 번 했는지, 이름 몇 번 바꿨는지 알 수 없다"며 "최 목사가 내가 어려운 시절에 도왔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또 당시 최씨와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루머에 대해서 "이런 네거티브는 천벌을 받을 짓 아닌가. 애를 데리고 오면 DNA 검사라도 하겠다"고 말했다.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朴의 아킬레스건' 정수장학회… 캠프 내에서도 부담 느껴

  • 최재혁 기자
  • 입력 : 2012.08.23 02:28

    [대선후보로서 해결할 문제] ③ 정수장학회
    '장물' 논란 - 朴측 "김지태씨가 자진 헌납", 野 "박정희 정권이 강탈한 것"
    朴후보 영향력도 구설수 - 1995년부터 10년간 이사장… 후임에 朴정권때 비서관 최필립
    노무현 정권서 2차례 조사 - 盧 前대통령, 김지태씨가 만든
    부일장학회 장학생 출신… 과거사委 "金씨 명예회복 필요"
    박근혜 "나는 완전히 손 뗐다" - "제가 어떻게 하는 것보다 장학회가 입장 표명해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정치 전면에 나설 때마다 '정수장학회' 문제로 공격을 받았다. 5년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논란이 됐고 이번엔 야권이 이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장물(贓物)' 논란

    야권은 정수장학회를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2년 고(故) 김지태씨의 개인 재산과 부일장학회를 강탈한 장물(贓物)'이라고 주장해 왔다. 반면 박 후보 측과 정수장학회는 "부정 축재 혐의를 받던 김지태씨가 구명을 위해 자진 헌납한 재산"이라고 반박했다. 박 후보는 여러 차례 "문제가 있었으면 지난 정권에서 가만히 내버려뒀겠느냐"고 해왔다.

    김지태씨는 부산 지역의 기업인 겸 정치인이었다. 김씨는 5·16 군사 정변 이후인 1962년 4월 24일 관세법 위반 등 혐의로 경남 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 그는 자기 소유의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주식을 국가에 헌납하고 그해 6월 22일 석방됐다.

    서울 중구 정동의 경향신문 빌딩 11층에 있는 정수장학회 사무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196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설립한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1995년부터 10년 가까이 지냈다. 박 후보는 “장학회 운영에 완전히 손을 뗐다”는 입장이지만 “박 후보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m

    이 과정에 대해 "당시 주식 포기 각서를 쓴 것은 강압에 의한 것"(김씨 유족)이란 주장과 "당시 재산적 가치가 별로 없는 주식들을 기증하고 선처받은 것"(정수장학회)이란 주장이 맞선다. 김지태씨 유족은 2010년 6월 "강압에 의한 재산 헌납"이라며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주식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에서 패소했고 현재 항소심에 계류 중이다. 장학재단인 정수장학회는 공익법인이고, 주무 관청은 서울시교육청이다.

    ◇'박근혜 영향력' 논란과 고액 연봉

    박 후보는 1995년 9월부터 10년 가까이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1999년 12월까지는 비상근 이사장, 2000년 1월~2005년 2월은 상근 이사장이었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정수장학회 문제가 정치권의 쟁점이 되자 이사장 자리를 내놨다. "그때부터 정수장학회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게 박 후보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럼에도 후임 이사장이 최필립 전 리비아 대사라는 점 때문에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최 전 대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의전비서관, 섭외비서관을 거쳐 1978년 '박근혜 담당 공보비서관'으로 1년간 근무했다. 그는 박 후보가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을 때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 다른 이사 4명 가운데 송광용 전 서울교대 총장과 김덕순 전 경기경찰청장은 박 후보가 이사장일 때 선임됐다. 이후 선임된 신성오 전 필리핀 대사와 최성홍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최 이사장의 외교통상부 후배다.

    이런 논란에 대해 박 후보는 지난 2월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권한이 없는) 제가 어떻게 하는 것보다 장학회에서 분명히 입장 표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었다.

    박 후보는 비상근 이사장 재임 때 섭외비로 연간 1억~1억3500만원, 상근 이사장 재임 때는 연간 1억2900만~2억3520만원을 받았다. 2002년 3월 세계일보는 박 후보가 1998~1999년 받은 섭외비에 대한 탈세 의혹 등을 보도했다. 박 후보 측은 "섭외비나 판공비는 비과세 대상이었다가 1998년 하반기 세법(稅法) 개정으로 과세 대상에 포함됐다. 재단 실무진이 종전대로 처리하는 바람에 빚어진 실수로 2002년 4월 소득세 1억2000만원을 완납했다"고 했다.

    ◇부산일보 분규로 재점화

    정수장학회 논란은 작년 말 정수장학회 소유의 부산일보 분규로 재점화했다. 노조가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과 사장 선출권'을 요구하면서 장학회와 대치했다. 노조 측은 "정수장학회가 박 후보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주장했다. 장학회 측은 "이미 편집국장 선출권이 기자들에게 있고 부산일보 지면이 박 후보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만큼 편집권은 독립돼 있다"고 반박했다. 정수장학회가 설립 이후 장학금을 지원한 이는 3만8000여명이다. 장학생들은 대학 재학 때는 '청오회', 졸업한 뒤에는 '상청회'란 모임에 가입된다. 정·관·학계 등에 두루 포진한 이들에 대해선 '박근혜의 우군(友軍)'이란 지적도 나온다.

    ◇과거 정권에서 두 차례 조사

    정수장학회는 1962년 김지태씨가 헌납한 재산을 기본 재산으로 출범했다. 문화방송 주식 2만주(발행 주식의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1만3100주(65.5%), 부산일보 주식 2만주(100%) 등이다. 원래는 부산 지역 땅 10만평도 포함됐으나 이는 1963년 국방부에 양도됐다. 원래 명칭은 '5·16장학회'였다가 전두환 대통령 때인 198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正)', 육영수 여사의 '수(修)'자를 딴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정수장학회의 재산은 문화방송 지분 30%, 부산일보 지분 100%,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대지 2385㎡(723평), 예금 200여억원, 주상 복합 아파트 한 채다. "문화방송이 민영화될 경우 자산 가치가 최소 10조원대로 추산되는 만큼 정수장학회 재산을 수조원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7월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사유재산처럼 운영됐던 정수장학회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또 2007년 6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김지태씨) 명예 회복과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헌납 주식에 대해 원상회복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국가가 손해를 배상하라"고 권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지태씨가 1962년까지 운영했던 부일장학회 장학생 출신이다.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野 "영남대도 朴후보 영향력 아래에 있다"… 朴 "잘못 있었다면 역대 정권서 문제됐을 것"

  • 김시현 기자
  • 입력 : 2012.08.23 01:46

    [1988년 이사직 그만둬]
    영남대, 1988년 학내 비리로 분규 빚다 2009년 정상화
    朴후보, 당시 학내 비리 관련 "이사 임무와 무관, 관여 안해"

    야권은 정수장학회와 마찬가지로 영남대<사진>도 여전히 박근혜 후보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박 후보는 1980년 3월 영남대 재단인 영남학원 이사에 취임한 데 이어 한 달 뒤 3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재학생들이 반대시위를 하는 등 반발이 있자 7개월 만에 이사장직에서 물러나 이사직만 유지했다. 1988년 영남대는 학내 분규에 휩싸였다. 부정입학, 산하 영남투자금융·영남의료원 비리가 불거졌다. 박 후보는 1988년 11월 이사직도 사퇴했다.

    학내 비리에 대해 박 후보는 2007년 한나라당 경선청문회에서 "이사 임무와는 무관했고 관여한 적이 없다. 조금이라도 내게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역대 정권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박 후보 측은 "이사장 재임 때 20만원의 판공비를 1번 받았고 그 외 이사회 참석 때 몇만 원 정도의 출무 수당을 받았을 뿐"이라고 했다.

    영남대가 재단 돈으로 박 후보를 간접 지원했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1987년 박 후보는 대만 문화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영남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기금 중 800여만원을 대만 문화대학에 기부금으로 출연했다. 박 후보는 "두 대학 간에 1975년부터 교류가 있었고 서로 지원도 했는데, 그게 무슨 기부금을 냈다는 것인지 저는 모른다"고 했다. 1986년 영남재단 산하 영남의료원과 영남투자금융은 각각 3740만원, 1억3000만원을 육영재단에 기부했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제가 강요한 적은 없다. 제가 (육영재단) 이사장이라는 것도 배려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고 했다.

    1986년 영남대병원장의 해외출장비 280여만원이 박 후보의 동생 지만씨의 미국행 항공료로 사용됐고 당시 병원장이 미국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박 후보는 "동생이 충격에서 안정이 안 된 상황에서 보호자로 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1988년 관선이사체제로 전환된 영남대는 2009년 정상화됐다.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설립자 유족'인 박 후보에게 이사 7명 가운데 4명의 추천권을 줬다. 박 후보는 현 이사장인 우의형 전 서울행정법원장 등을 추천했다.

    영남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7년 청구대와 대구대를 통합해 설립했다. 박 후보가 이사로 있던 1981년 영남학원 정관 1조에 '교주(校主)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라는 문구가 삽입된다. 박 후보는 "그 결정을 했던 이사회에 참석했으며 당시 이사 중 한 분의 제안으로 이뤄졌다"고 했다. 이 문구는 2011년 5월 '설립자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로 바뀐다.

    출처 : 학성산의 행복찾기
    글쓴이 : 학성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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