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제 알아야" 아버지 권유 商大 진학
중3때 반장 맡았지만 42차례 지각도
성적은 中上… 축구·권투·스키 등 즐겨
정몽준(鄭夢準)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1년 11월 25일(음력 10월 27일) 피란지인 부산시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주민등록상 생일은 10월 17일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鄭周永.작고)의 8남1녀(호적 기준) 중 여섯째 아들이었다. 휴전 직후인 53년 서울로 옮겨 성장기를 보냈다.
정몽준의 호적상 어머니는 변중석(邊仲錫.81)이다. 현재 투병 중인 邊씨는 2000년부터 의식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낳아준 어머니는 따로 있다.
정몽준은 젖먹이 때 생모 곁을 떠나 邊여사에게 맡겨져 생모의 존재를 모른 채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중.고교 시절 정몽준의 집에 드나들던 친한 친구들은 변중석과 정몽준이 친 모자간이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다고 한다. 워낙 스스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말은 기본이고 "시끄러" "나가" 등의 어리광 섞인 말투가 입에 배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정주영이 용돈을 적게 주면 변중석에게 따로 받아내기도 했다. 변중석은 정몽준이 대학 3학년 때인 73년 여름에 학과 수학여행지인 경포대로 따라가 뒷바라지했을 정도로 몽준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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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男 1女 여섯째 아들
정몽준의 어린 시절 기억은 서울시 중구 장충동 1가의 집과 동네에서 시작된다. 수구문(水口門)터에 자리한 시장이 집 근처에 있었고 시장 안에 있는 유치원을 다녔다. 삼성그룹 전 회장 이병철(李秉喆.작고)과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金昇淵)의 부친 김종희(金鍾喜.작고)의 집이 같은 동네에 있었다.
정몽준네는 대가족이었다. 정몽준은 "집도 여관집 같았고 분위기도 여관집 같았다. 우리 형제에 삼촌들까지 같이 살아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에 맞추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정몽준은 "문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 나가보면 형들이 다른 사람들하고 패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둘째형 몽구(夢九), 셋째형 몽근(夢根)은 각각 열세살과 아홉살 위였는데 경복고 시절 힘깨나 썼다고 한다. 몽구는 장사여서 다른 사람을 번쩍 들기도 했다.
정몽준은 58년 4월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집 근처 막걸리집 앞 유리창에 진열된 고사용 돼지머리를 보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늘 무서워했다. 박근혜(朴槿惠.미래연합 대표).김승연.김종필(金鍾泌.자민련 총재)의 딸 예리가 동기생이었다. 정몽준은 김승연의 자전거를 많이 빌려 탔다. 김승연은 요즘도 만나면 "자전거 빌려 탄 돈 왜 안내느냐"고 농담한다고 한다.
정몽준네는 같은 해 종로구 청운동으로 이사한다. 정몽준은 개구쟁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에는 '활기있고 명랑하나 장난이 심하고 코를 병적으로 흘림. 성질이 급해서 글씨를 함부로 갈겨 쓰는 경향이 있으나 사고력이 빠름'(1학년), '수업 중 산만하고 항상 코를 흘리고 글씨도 더럽게 씀'(2학년) 등으로 기록돼 있다.
정몽준은 코를 많이 흘렸다. "다섯째 숙모는 내가 어찌나 코를 많이 흘렸던지 밥을 같이 못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가 아마 4학년 때쯤 됐을 것이다." 다섯째 숙모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하다 독일유학 중 사망한 삼촌 정신영(鄭信永)의 부인 장정자(張貞子.현대학원 이사장)다.
학업성적은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상위권에 속했다. 생활기록부에서 '명랑.쾌활'이라는 표현이 전 학년 공통으로 등장한다. 대가족이 한집에서 같이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주로 동해안으로 놀러 갔다.
한번은 경포대에서 간이텐트를 쳐놓고 어머니가 부쳐준 감자전을 먹고 있었는데 식구 숫자가 많아서 지나가던 사람이 가게인 줄 알고 '아줌마 이거 얼마예요'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
정몽준은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렸고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귀여워했다. "아버지가 나가시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쥐어박으셨다."
정몽준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공사장 인부들은 노임을 내놓으라고 파업을 하고, 사무실이고 집이고 매일 빚쟁이들로 지옥이었다. 몽준이는 지금도, 어렸을 때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빚쟁이들이 집에 와 도끼로 마루를 쾅쾅 찍으며 돈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던 것이라고 하는 모양이다."(정주영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
정몽준의 생애 첫 좌절은 중학교 입시 낙방이었다. 시험을 보고 와서 답안을 맞춰보니 세 문제 틀렸다. 주변에서는 그 정도면 1등으로 붙는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 실시된 체력시험을 성의없이 치른 게 화근이 됐다고 본인은 주장한다.
경기중 입시에 떨어진 정몽준은 2차인 중앙중에 입학한다. 실제 나이가 두살 차이로 한방을 쓰면서 우애를 나눴던 바로 위 형 몽헌(夢憲)은 훗날 "중학입시 실패가 몽준이에게 약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몽준이 중.고교를 다니던 시절(64~70년)에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몽준은 그런 사실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었다. 동기생 주수암(사업)은 "중학교 2학년 때 '너네집 뭐하니'라고 물으면 잘 모른다고 했다"고 전했다.
전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차남으로, 정몽준과 중앙중 1년 때부터 중앙고 1년 때까지 4년간 같은 반이었던 윤동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몽준이는 주저함이나 겁이 없었다. 운동을 좋아했고 뭐든지 열심히 했다.
키가 큰 몽준이는 키가 작은 나를 돌봐주는 쪽이었다"고 기억한다. 중.고교 동기 고영수(개그맨)는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면 몽준이는 노래도 잘 못하면서 꼭 한 곡씩 불렀다"고 말했다. 정몽준은 운동화를 일부러 찌그러뜨려 신고 교복의 칼라를 떼고 하얀 티셔츠를 받쳐 입는 등 '중앙패션'을 선도하기도 했다.
정몽준은 중학교 1학년과 3학년 때 반장을 했다.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임환(任桓)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통솔력이 있었고 친구들이 잘 따랐다. 까불기도 했고 아주 잘 놀았다"고 말했다. 중학교 3학년 때 하루는 수업이 끝나기 전에 정몽준이 같은 반 친구들을 데리고 학교 밖으로 놀러가 버렸다. 정몽준은 다음날 실컷 종아리를 맞았다.
정몽준은 지각을 많이 했다. 생활기록부에는 3학년 때 42차례나 지각을 한 것으로 적혀 있다. 임환은 광화문 현대건설 사장실로 정주영을 찾아가 "반장인데 자꾸 지각해서 안되겠습니다. 통학용으로 자동차를 한대 배정해주든지 하세요"라고 권했다. 그러자 정주영은 "선생님, 그러면 버릇이 나빠집니다. 대신 내일부터 지각하지 않도록 만들겠습니다"라고 했다.
정주영에게 혼쭐이 났는지 그 이후 정몽준의 지각하는 버릇은 없어졌다고 한다. 임환은 교장의 지시로 학교도서관을 짓는 데 필요한 시멘트 1만부대를 정주영으로부터 얻어오기 전까지는 정몽준이 부잣집 아들인지 몰랐다고 한다.
'부잣집 아들'티 안내
고아들로 이뤄진 중앙중 축구부원들과의 만남이 축구와의 첫 인연이었다. 서울 은로국민학교 소속으로 전국을 제패해 '맨발의 영광'이라는 영화가 나오도록 했던 고아 선수들은 정몽준과 같은 해 중앙중에 입학했다. 당시 축구부 부장이었던 교사 정신택(75)은 "몽준이는 정이 많아 호주머니를 털어 간식을 사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
1학년 때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봄철 축구대회 결승전은 정몽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전원이 3학년인 경희중 선수들은 1학년인 중앙중 선수보다 목이 하나 더 있을 정도로 체격이 좋았다. 중앙중 선수들은 죽어라 뛰었고 학생들도 정성을 다해 응원했다.
동기생 이재성(현대선물 사장)은 "가슴 벅찬 일체감 속에 선수들 동작 하나하나에 가슴이 쿵쿵 뛰는 경험을 했다.그러나 결국 2대0으로 졌다. 전교생과 선수들이 운동장에 주저앉아 함께 울었다"고 말했다.
정몽준의 중학교 성적은 중상 정도였다.1학년 성적은 평균 81점으로 전체 4백96명 중 1백4등을 기록했고, 3학년 때는 평균 75점으로 4백90명 중 1백6등을 기록했다. 2학년 성적란에는 평균점수만 81점이라고 쓰여 있었고 종합석차는 적혀 있지 않았다. 2학년 때인 64년 4월 2일 실시한 지능지수 검사의 결과는 1백31이었다.
정몽준은 무시험으로 중앙고에 진학했다.동기생 주수암은 "많은 친구들이 경기.서울고로 빠져 나갔지만 몽준이는 중앙고로 가자고 설득했다"고 했다.
정몽준은 고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배운 한글 세대다."고1 초에 담임선생님이 한자로 이름을 적어내라고 하기에 손을 들어 모른다고 했다. 나는 실제로 쓸 줄 몰라서 그런 건데 놀린 것으로 오해받아 실컷 맞았다."
정몽준의 성장 과정에서 운동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중.고교 시절 축구.농구.승마.스키.권투.수영.다이빙.체조에 손을 댔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육상.테니스.수상스키가 추가된다. 주수암이 "몽준이는 학창 시절을 땀에 절어 보냈다"고 말할 정도였다. 덕분에 부상도 많이 당했다. 중학교 때는 다이빙 연습 도중 두번이나 물이 아닌 맨바닥으로 떨어져 크게 다쳤다. 골절상도 다섯번 당했다.
정몽준은 고1 때 권투도장에 3,4개월 정도 다녔는데 상당한 소질을 보여 프로 입문을 권유받기도 했다. 가장 구사하기 힘들다는 스트레이트 펀치를 제대로 날렸다고 한다. 이 무렵 역도부 소속의 한 친구와 일합을 겨루게 된다.
수업시간에 어느 선생님이 "교내에 빵집을 하나 내자"고 하자 정몽준이 "역도부 옆 창고가 좋겠다"고 한 게 역도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현재의 감사원 자리인 학교 뒷산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옷은 전부 피범벅이 됐고 상대방은 쓰러져 있었다." 이후 정몽준은 교내에서 유명해졌지만 위협 때문에 학교를 일주일간 결석해야 했다.
스키종목 體典 입상도
정몽준은 스키광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식 선수들에게 기술로는 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담력이 요구되는 활강 종목을 선택해 밤새도록 연습했다. 어깨뼈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전혀 기죽지 않았다. 가파른 고개에서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리는 활강은 당시 내로라하는 국가대표 선수들도 기피할 정도여서 군 복무 시절 전국체전에서 입상하기까지 했다.
정몽준은 개를 좋아해 정을 많이 쏟았다. 고1 때 자전거 뒤에 개를 매달고 달렸는데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개가 끌려가면서 발을 심하게 다쳤다. 개는 죽어갔고 회복 가능성이 없었다. 정몽준은 그 개를 간호해 살려냈다고 한다.
정몽준은 고교 시절 이화여고생을 짝사랑했다. 장난기 많은 친구들은 이를 알았고 끝내는 유병진(관동대 총장)이 당시 청소년들에게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이종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청운동 준이'라는 이름으로 연서를 보내 방송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랬는지 정몽준은 많이 먹었다. 도시락을 두개 싸가서 등교하자마자 하나를 먹고 나머지는 점심시간 때 먹었다.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앞에 나서서 설치지 않았고 신중하고 착실한 성격이었다"고 기억한다.
정몽준은 중.고교시절 바로 위의 형인 몽헌을 좋아했다. 친구들에게 "몽헌이 형은 뭐든지 안다"고 자랑했다. "몽헌이 형이 대학에 들어간 뒤 미팅한 얘기를 흥미있게 들었고, 몽준이 집에서 몽헌이 형이 친구들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펄시스터즈 춤을 추면 우리도 한쪽에서 따라 추기도 했다."(주수암)그러나 다른 형들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어려워했다고 한다.
고교시절 정몽준의 성적은 1학년 때 전교생 4백90명 중 84등, 2학년 때는 문과생 1백60명 가운데 5등,3학년 때는 문과 1백60명 중 9등이었다. 정몽준은 영어.독일어.체육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독일어는 62년 독일유학 중 사망한 삼촌 정신영의 영향을 받아 열심히 했고 3학년 때는 서울사대 주관 독일어 경시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정몽준은 70년 이재성과 함께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정주영이 "경제를 알아야 경영을 한다"고 권했다고 한다. 정몽준을 포함한 중앙고 61회 졸업생 가운데 1백50여명이 그해 서울대에 입학했다.
정몽준의 대학생활은 대체로 평범했다.3선개헌.10월유신 반대투쟁으로 대학가는 데모 열풍에 휩싸였다. 정몽준이 졸업할 때까지 매학년 2학기는 휴교였다.1학기 수업도 거의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정몽준은 시위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정몽준은 공릉동 교양학부 시절 불유쾌한 경험을 한다.1학년 2학기말 시험에서 맨 뒷자리에 앉아 다른 친구의 답안지를 베끼다가 적발됐다. 민석홍 교수의 문화사 시험이었다. 정몽준은 2학기 전과목 학점을 몰수당하고 6개월 정학을 받았다. 1학년 1학기에 국어와 철학개론 과목에서 F학점을 받은 데 이어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학년 마지막 시험이어서 끝나면 놀러간다는 기분에 좀 풀어졌던 것 같다. 잘못했다고 했으면 그렇게까지 일이 확대되지 않았을텐데 선생님께 결례되는 행동을 했다." 본인은 괜찮았지만 부모님께 설명할 일이 막막했다고 한다.
정몽준은 1학년을 마치고 72년부터 종암동 서울상대 캠퍼스에서 3년간 학교를 다닌다. 70학번이지만 71학번과 줄곧 어울려 지냈다. 스터디그룹에도 참여한다. "공부를 매우 꼼꼼하고 진지하게 했다. 의문이 생기면 풀릴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이재성)
서울대 입학 동기인 오연천(서울대 행정대학원장.정치학과 70학번)은 "정몽준은 호기심이 많고 논리적이며 기억력이 좋았다"고 말한다. 경제학과 71학번인 박태호(서울대 대외협력본부장)는 "강의실에서는 거의 얼굴을 못봤고 체육대회에선 자주 봤다.
70학번인 줄 알았지만 서로 반말을 하면서 지냈다"고 했다. 정몽준은 박태호 등 상대 대표 계주선수들을 연습시켰다. 정몽준은 육상 단거리이론에 정통했다고 박태호는 기억한다.
한번은 주수암.유병진 등 중앙고 동기 셋이 장발 단속에 걸려 약수파출소에 끌려갔다. 자술서를 쓰는데 경찰관이 정몽준의 머리통을 치면서 "야 임마, 글씨가 국민학생만도 못한 네가 무슨 서울대생이냐"고 야단쳤다. 정몽준의 악필은 대학에 가서도 개선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몽준은 때론 거침없는 행동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다른 남자를 사귀는 것을 알고 그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해 일방적으로 혼을 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학생은 끝내 정몽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오연천은 "몽준이가 이화여고 출신의 연세대 여학생을 사귀었는데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대학 2학년 때는 클라리넷을 배웠다. 숙모 장정자가 독일에서 들어오면서 가져온 악기였다. KBS의 아마추어 대상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고 집안 결혼식 때 축가를 연주한 적이 있지만 솜씨는 보통 이하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정몽준은 74년 봄 학과 졸업여행을 경주로 가게 된다. 인솔 교수는 변형윤(邊衡尹)이었다. 일정에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와 현대자동차 공장 견학이 포함돼 있었다. 변형윤은 현대자동차 견학 중 일제 미쓰비시 엔진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중간자재는 생산하지 않고 최종재만 만들기 때문에 자본종속이 일어난다"고 비판했다.
다음날 아침 정주영은 아들 일행을 영빈관으로 불러 조찬을 대접한다. 한 학생이 재벌중심 경제의 폐해를 지적하자 정주영은 일단 그런 점을 인정한 뒤 "경제성장의 과도기에서는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이 무렵 정주영은 현대중공업 회장을 서울대 총장보다 명예로운 자리로 만들어 정몽준에게 맡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ROTC로 병역 마쳐
정몽준은 대학 3학년 때부터 ROTC(13기) 군사훈련을 받았다. 상대 동기생 가운데 ROTC 과정을 거친 사람은 모두 20명이었다. 형제 중 여럿이 사병으로 입대해 고생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지원했다.
"몽구형이 훈련소에서 조교를 두들겨패서 영창에 간 적이 있다. 그래서 군대문제를 잘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제학과 71학번으로 정몽준과 함께 ROTC를 한 이충식(사업)은 "휴교령 때문에 텅빈 교정에서 훈련받고 축구하고 막걸리 마시면서 재미있게 보냈다. 정몽준은 체력이 끝내줬다"고 전한다. 정몽준은 통역장교를 지원했지만 영어시험을 잘못봐 경리장교로 배치됐다. 대학졸업 후 정몽준은 경기도 양평 5사단 경리참모부에서 근무했다.
정몽준의 군대시절 부하로 근무했던 송환기(사업)의 얘기다. "한번은 축구시합을 하는데 상대 선수의 태클로 정소위의 무릎뼈에 금이 갔다. 사병인 상대선수는 쓰러진 정소위를 보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야 괜찮아, 며칠 치료하면 되겠지.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하면서 들것에 실려나갔다."
정몽준은 군 시절 퇴근 후 하숙집에서 유학에 대비해 공부했다. 77년 6월 중위로 제대한 뒤 78년 1월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한다.
정몽준은 학교 근처 작은 아파트에서 지냈다. 컬럼비아대 시절에는 정운찬(서울대 총장).박진원(변호사).주진우(한나라당 의원).이필상(고려대 교수).백남치(전 의원)등과 교류했다.
이 무렵 정몽준의 승부사적 기질과 최고.일류 지향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주위에서는 아버지가 인정할 수 있는 아들이 되기 위한 집요한 노력으로 풀이한다.
중앙고 동기생 이승훈(리인터내셔널 대표)은 "중간고사 통계학 시험에서 몽준이는 95점으로 A학점을 받았다. 교수가 시험을 잘못 본 학생들을 위해 재시험 기회를 주었다. 몽준이는 재시험이 필요없었는데도 다시 시험을 봐서 만점을 받았다"고 전했다.
정몽준은 한 학기만 마치고 78년 8월 MIT대 경영대학원으로 옮겨 80년 6월 졸업했다. 고교 1년 후배 양봉진(한경닷컴 사장)은 "어느날 'MIT로 옮기기 위해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양복이 없다'며 백화점에 같이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부잣집 아들 티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3때 반장 맡았지만 42차례 지각도
성적은 中上… 축구·권투·스키 등 즐겨
정몽준(鄭夢準)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1년 11월 25일(음력 10월 27일) 피란지인 부산시 범일동에서 태어났다. 주민등록상 생일은 10월 17일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鄭周永.작고)의 8남1녀(호적 기준) 중 여섯째 아들이었다. 휴전 직후인 53년 서울로 옮겨 성장기를 보냈다.
정몽준의 호적상 어머니는 변중석(邊仲錫.81)이다. 현재 투병 중인 邊씨는 2000년부터 의식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낳아준 어머니는 따로 있다.
정몽준은 젖먹이 때 생모 곁을 떠나 邊여사에게 맡겨져 생모의 존재를 모른 채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중.고교 시절 정몽준의 집에 드나들던 친한 친구들은 변중석과 정몽준이 친 모자간이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다고 한다. 워낙 스스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말은 기본이고 "시끄러" "나가" 등의 어리광 섞인 말투가 입에 배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정주영이 용돈을 적게 주면 변중석에게 따로 받아내기도 했다. 변중석은 정몽준이 대학 3학년 때인 73년 여름에 학과 수학여행지인 경포대로 따라가 뒷바라지했을 정도로 몽준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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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男 1女 여섯째 아들
정몽준의 어린 시절 기억은 서울시 중구 장충동 1가의 집과 동네에서 시작된다. 수구문(水口門)터에 자리한 시장이 집 근처에 있었고 시장 안에 있는 유치원을 다녔다. 삼성그룹 전 회장 이병철(李秉喆.작고)과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金昇淵)의 부친 김종희(金鍾喜.작고)의 집이 같은 동네에 있었다.
정몽준네는 대가족이었다. 정몽준은 "집도 여관집 같았고 분위기도 여관집 같았다. 우리 형제에 삼촌들까지 같이 살아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에 맞추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정몽준은 "문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 나가보면 형들이 다른 사람들하고 패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둘째형 몽구(夢九), 셋째형 몽근(夢根)은 각각 열세살과 아홉살 위였는데 경복고 시절 힘깨나 썼다고 한다. 몽구는 장사여서 다른 사람을 번쩍 들기도 했다.
정몽준은 58년 4월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집 근처 막걸리집 앞 유리창에 진열된 고사용 돼지머리를 보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늘 무서워했다. 박근혜(朴槿惠.미래연합 대표).김승연.김종필(金鍾泌.자민련 총재)의 딸 예리가 동기생이었다. 정몽준은 김승연의 자전거를 많이 빌려 탔다. 김승연은 요즘도 만나면 "자전거 빌려 탄 돈 왜 안내느냐"고 농담한다고 한다.
정몽준네는 같은 해 종로구 청운동으로 이사한다. 정몽준은 개구쟁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에는 '활기있고 명랑하나 장난이 심하고 코를 병적으로 흘림. 성질이 급해서 글씨를 함부로 갈겨 쓰는 경향이 있으나 사고력이 빠름'(1학년), '수업 중 산만하고 항상 코를 흘리고 글씨도 더럽게 씀'(2학년) 등으로 기록돼 있다.
정몽준은 코를 많이 흘렸다. "다섯째 숙모는 내가 어찌나 코를 많이 흘렸던지 밥을 같이 못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가 아마 4학년 때쯤 됐을 것이다." 다섯째 숙모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하다 독일유학 중 사망한 삼촌 정신영(鄭信永)의 부인 장정자(張貞子.현대학원 이사장)다.
학업성적은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상위권에 속했다. 생활기록부에서 '명랑.쾌활'이라는 표현이 전 학년 공통으로 등장한다. 대가족이 한집에서 같이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주로 동해안으로 놀러 갔다.
한번은 경포대에서 간이텐트를 쳐놓고 어머니가 부쳐준 감자전을 먹고 있었는데 식구 숫자가 많아서 지나가던 사람이 가게인 줄 알고 '아줌마 이거 얼마예요'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
정몽준은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렸고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귀여워했다. "아버지가 나가시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쥐어박으셨다."
정몽준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공사장 인부들은 노임을 내놓으라고 파업을 하고, 사무실이고 집이고 매일 빚쟁이들로 지옥이었다. 몽준이는 지금도, 어렸을 때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빚쟁이들이 집에 와 도끼로 마루를 쾅쾅 찍으며 돈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던 것이라고 하는 모양이다."(정주영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
정몽준의 생애 첫 좌절은 중학교 입시 낙방이었다. 시험을 보고 와서 답안을 맞춰보니 세 문제 틀렸다. 주변에서는 그 정도면 1등으로 붙는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 실시된 체력시험을 성의없이 치른 게 화근이 됐다고 본인은 주장한다.
경기중 입시에 떨어진 정몽준은 2차인 중앙중에 입학한다. 실제 나이가 두살 차이로 한방을 쓰면서 우애를 나눴던 바로 위 형 몽헌(夢憲)은 훗날 "중학입시 실패가 몽준이에게 약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몽준이 중.고교를 다니던 시절(64~70년)에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몽준은 그런 사실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었다. 동기생 주수암(사업)은 "중학교 2학년 때 '너네집 뭐하니'라고 물으면 잘 모른다고 했다"고 전했다.
전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차남으로, 정몽준과 중앙중 1년 때부터 중앙고 1년 때까지 4년간 같은 반이었던 윤동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몽준이는 주저함이나 겁이 없었다. 운동을 좋아했고 뭐든지 열심히 했다.
키가 큰 몽준이는 키가 작은 나를 돌봐주는 쪽이었다"고 기억한다. 중.고교 동기 고영수(개그맨)는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면 몽준이는 노래도 잘 못하면서 꼭 한 곡씩 불렀다"고 말했다. 정몽준은 운동화를 일부러 찌그러뜨려 신고 교복의 칼라를 떼고 하얀 티셔츠를 받쳐 입는 등 '중앙패션'을 선도하기도 했다.
정몽준은 중학교 1학년과 3학년 때 반장을 했다.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임환(任桓)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통솔력이 있었고 친구들이 잘 따랐다. 까불기도 했고 아주 잘 놀았다"고 말했다. 중학교 3학년 때 하루는 수업이 끝나기 전에 정몽준이 같은 반 친구들을 데리고 학교 밖으로 놀러가 버렸다. 정몽준은 다음날 실컷 종아리를 맞았다.
정몽준은 지각을 많이 했다. 생활기록부에는 3학년 때 42차례나 지각을 한 것으로 적혀 있다. 임환은 광화문 현대건설 사장실로 정주영을 찾아가 "반장인데 자꾸 지각해서 안되겠습니다. 통학용으로 자동차를 한대 배정해주든지 하세요"라고 권했다. 그러자 정주영은 "선생님, 그러면 버릇이 나빠집니다. 대신 내일부터 지각하지 않도록 만들겠습니다"라고 했다.
정주영에게 혼쭐이 났는지 그 이후 정몽준의 지각하는 버릇은 없어졌다고 한다. 임환은 교장의 지시로 학교도서관을 짓는 데 필요한 시멘트 1만부대를 정주영으로부터 얻어오기 전까지는 정몽준이 부잣집 아들인지 몰랐다고 한다.
'부잣집 아들'티 안내
고아들로 이뤄진 중앙중 축구부원들과의 만남이 축구와의 첫 인연이었다. 서울 은로국민학교 소속으로 전국을 제패해 '맨발의 영광'이라는 영화가 나오도록 했던 고아 선수들은 정몽준과 같은 해 중앙중에 입학했다. 당시 축구부 부장이었던 교사 정신택(75)은 "몽준이는 정이 많아 호주머니를 털어 간식을 사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
1학년 때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봄철 축구대회 결승전은 정몽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전원이 3학년인 경희중 선수들은 1학년인 중앙중 선수보다 목이 하나 더 있을 정도로 체격이 좋았다. 중앙중 선수들은 죽어라 뛰었고 학생들도 정성을 다해 응원했다.
동기생 이재성(현대선물 사장)은 "가슴 벅찬 일체감 속에 선수들 동작 하나하나에 가슴이 쿵쿵 뛰는 경험을 했다.그러나 결국 2대0으로 졌다. 전교생과 선수들이 운동장에 주저앉아 함께 울었다"고 말했다.
정몽준의 중학교 성적은 중상 정도였다.1학년 성적은 평균 81점으로 전체 4백96명 중 1백4등을 기록했고, 3학년 때는 평균 75점으로 4백90명 중 1백6등을 기록했다. 2학년 성적란에는 평균점수만 81점이라고 쓰여 있었고 종합석차는 적혀 있지 않았다. 2학년 때인 64년 4월 2일 실시한 지능지수 검사의 결과는 1백31이었다.
정몽준은 무시험으로 중앙고에 진학했다.동기생 주수암은 "많은 친구들이 경기.서울고로 빠져 나갔지만 몽준이는 중앙고로 가자고 설득했다"고 했다.
정몽준은 고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배운 한글 세대다."고1 초에 담임선생님이 한자로 이름을 적어내라고 하기에 손을 들어 모른다고 했다. 나는 실제로 쓸 줄 몰라서 그런 건데 놀린 것으로 오해받아 실컷 맞았다."
정몽준의 성장 과정에서 운동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중.고교 시절 축구.농구.승마.스키.권투.수영.다이빙.체조에 손을 댔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육상.테니스.수상스키가 추가된다. 주수암이 "몽준이는 학창 시절을 땀에 절어 보냈다"고 말할 정도였다. 덕분에 부상도 많이 당했다. 중학교 때는 다이빙 연습 도중 두번이나 물이 아닌 맨바닥으로 떨어져 크게 다쳤다. 골절상도 다섯번 당했다.
정몽준은 고1 때 권투도장에 3,4개월 정도 다녔는데 상당한 소질을 보여 프로 입문을 권유받기도 했다. 가장 구사하기 힘들다는 스트레이트 펀치를 제대로 날렸다고 한다. 이 무렵 역도부 소속의 한 친구와 일합을 겨루게 된다.
수업시간에 어느 선생님이 "교내에 빵집을 하나 내자"고 하자 정몽준이 "역도부 옆 창고가 좋겠다"고 한 게 역도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현재의 감사원 자리인 학교 뒷산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옷은 전부 피범벅이 됐고 상대방은 쓰러져 있었다." 이후 정몽준은 교내에서 유명해졌지만 위협 때문에 학교를 일주일간 결석해야 했다.
스키종목 體典 입상도
정몽준은 스키광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식 선수들에게 기술로는 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담력이 요구되는 활강 종목을 선택해 밤새도록 연습했다. 어깨뼈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전혀 기죽지 않았다. 가파른 고개에서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리는 활강은 당시 내로라하는 국가대표 선수들도 기피할 정도여서 군 복무 시절 전국체전에서 입상하기까지 했다.
정몽준은 개를 좋아해 정을 많이 쏟았다. 고1 때 자전거 뒤에 개를 매달고 달렸는데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개가 끌려가면서 발을 심하게 다쳤다. 개는 죽어갔고 회복 가능성이 없었다. 정몽준은 그 개를 간호해 살려냈다고 한다.
정몽준은 고교 시절 이화여고생을 짝사랑했다. 장난기 많은 친구들은 이를 알았고 끝내는 유병진(관동대 총장)이 당시 청소년들에게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이종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청운동 준이'라는 이름으로 연서를 보내 방송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랬는지 정몽준은 많이 먹었다. 도시락을 두개 싸가서 등교하자마자 하나를 먹고 나머지는 점심시간 때 먹었다.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앞에 나서서 설치지 않았고 신중하고 착실한 성격이었다"고 기억한다.
정몽준은 중.고교시절 바로 위의 형인 몽헌을 좋아했다. 친구들에게 "몽헌이 형은 뭐든지 안다"고 자랑했다. "몽헌이 형이 대학에 들어간 뒤 미팅한 얘기를 흥미있게 들었고, 몽준이 집에서 몽헌이 형이 친구들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펄시스터즈 춤을 추면 우리도 한쪽에서 따라 추기도 했다."(주수암)그러나 다른 형들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어려워했다고 한다.
고교시절 정몽준의 성적은 1학년 때 전교생 4백90명 중 84등, 2학년 때는 문과생 1백60명 가운데 5등,3학년 때는 문과 1백60명 중 9등이었다. 정몽준은 영어.독일어.체육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독일어는 62년 독일유학 중 사망한 삼촌 정신영의 영향을 받아 열심히 했고 3학년 때는 서울사대 주관 독일어 경시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정몽준은 70년 이재성과 함께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정주영이 "경제를 알아야 경영을 한다"고 권했다고 한다. 정몽준을 포함한 중앙고 61회 졸업생 가운데 1백50여명이 그해 서울대에 입학했다.
정몽준의 대학생활은 대체로 평범했다.3선개헌.10월유신 반대투쟁으로 대학가는 데모 열풍에 휩싸였다. 정몽준이 졸업할 때까지 매학년 2학기는 휴교였다.1학기 수업도 거의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정몽준은 시위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정몽준은 공릉동 교양학부 시절 불유쾌한 경험을 한다.1학년 2학기말 시험에서 맨 뒷자리에 앉아 다른 친구의 답안지를 베끼다가 적발됐다. 민석홍 교수의 문화사 시험이었다. 정몽준은 2학기 전과목 학점을 몰수당하고 6개월 정학을 받았다. 1학년 1학기에 국어와 철학개론 과목에서 F학점을 받은 데 이어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학년 마지막 시험이어서 끝나면 놀러간다는 기분에 좀 풀어졌던 것 같다. 잘못했다고 했으면 그렇게까지 일이 확대되지 않았을텐데 선생님께 결례되는 행동을 했다." 본인은 괜찮았지만 부모님께 설명할 일이 막막했다고 한다.
정몽준은 1학년을 마치고 72년부터 종암동 서울상대 캠퍼스에서 3년간 학교를 다닌다. 70학번이지만 71학번과 줄곧 어울려 지냈다. 스터디그룹에도 참여한다. "공부를 매우 꼼꼼하고 진지하게 했다. 의문이 생기면 풀릴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이재성)
서울대 입학 동기인 오연천(서울대 행정대학원장.정치학과 70학번)은 "정몽준은 호기심이 많고 논리적이며 기억력이 좋았다"고 말한다. 경제학과 71학번인 박태호(서울대 대외협력본부장)는 "강의실에서는 거의 얼굴을 못봤고 체육대회에선 자주 봤다.
70학번인 줄 알았지만 서로 반말을 하면서 지냈다"고 했다. 정몽준은 박태호 등 상대 대표 계주선수들을 연습시켰다. 정몽준은 육상 단거리이론에 정통했다고 박태호는 기억한다.
한번은 주수암.유병진 등 중앙고 동기 셋이 장발 단속에 걸려 약수파출소에 끌려갔다. 자술서를 쓰는데 경찰관이 정몽준의 머리통을 치면서 "야 임마, 글씨가 국민학생만도 못한 네가 무슨 서울대생이냐"고 야단쳤다. 정몽준의 악필은 대학에 가서도 개선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몽준은 때론 거침없는 행동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다른 남자를 사귀는 것을 알고 그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해 일방적으로 혼을 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학생은 끝내 정몽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오연천은 "몽준이가 이화여고 출신의 연세대 여학생을 사귀었는데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대학 2학년 때는 클라리넷을 배웠다. 숙모 장정자가 독일에서 들어오면서 가져온 악기였다. KBS의 아마추어 대상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고 집안 결혼식 때 축가를 연주한 적이 있지만 솜씨는 보통 이하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정몽준은 74년 봄 학과 졸업여행을 경주로 가게 된다. 인솔 교수는 변형윤(邊衡尹)이었다. 일정에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와 현대자동차 공장 견학이 포함돼 있었다. 변형윤은 현대자동차 견학 중 일제 미쓰비시 엔진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중간자재는 생산하지 않고 최종재만 만들기 때문에 자본종속이 일어난다"고 비판했다.
다음날 아침 정주영은 아들 일행을 영빈관으로 불러 조찬을 대접한다. 한 학생이 재벌중심 경제의 폐해를 지적하자 정주영은 일단 그런 점을 인정한 뒤 "경제성장의 과도기에서는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이 무렵 정주영은 현대중공업 회장을 서울대 총장보다 명예로운 자리로 만들어 정몽준에게 맡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ROTC로 병역 마쳐
정몽준은 대학 3학년 때부터 ROTC(13기) 군사훈련을 받았다. 상대 동기생 가운데 ROTC 과정을 거친 사람은 모두 20명이었다. 형제 중 여럿이 사병으로 입대해 고생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지원했다.
"몽구형이 훈련소에서 조교를 두들겨패서 영창에 간 적이 있다. 그래서 군대문제를 잘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제학과 71학번으로 정몽준과 함께 ROTC를 한 이충식(사업)은 "휴교령 때문에 텅빈 교정에서 훈련받고 축구하고 막걸리 마시면서 재미있게 보냈다. 정몽준은 체력이 끝내줬다"고 전한다. 정몽준은 통역장교를 지원했지만 영어시험을 잘못봐 경리장교로 배치됐다. 대학졸업 후 정몽준은 경기도 양평 5사단 경리참모부에서 근무했다.
정몽준의 군대시절 부하로 근무했던 송환기(사업)의 얘기다. "한번은 축구시합을 하는데 상대 선수의 태클로 정소위의 무릎뼈에 금이 갔다. 사병인 상대선수는 쓰러진 정소위를 보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야 괜찮아, 며칠 치료하면 되겠지.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하면서 들것에 실려나갔다."
정몽준은 군 시절 퇴근 후 하숙집에서 유학에 대비해 공부했다. 77년 6월 중위로 제대한 뒤 78년 1월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한다.
정몽준은 학교 근처 작은 아파트에서 지냈다. 컬럼비아대 시절에는 정운찬(서울대 총장).박진원(변호사).주진우(한나라당 의원).이필상(고려대 교수).백남치(전 의원)등과 교류했다.
이 무렵 정몽준의 승부사적 기질과 최고.일류 지향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주위에서는 아버지가 인정할 수 있는 아들이 되기 위한 집요한 노력으로 풀이한다.
중앙고 동기생 이승훈(리인터내셔널 대표)은 "중간고사 통계학 시험에서 몽준이는 95점으로 A학점을 받았다. 교수가 시험을 잘못 본 학생들을 위해 재시험 기회를 주었다. 몽준이는 재시험이 필요없었는데도 다시 시험을 봐서 만점을 받았다"고 전했다.
정몽준은 한 학기만 마치고 78년 8월 MIT대 경영대학원으로 옮겨 80년 6월 졸업했다. 고교 1년 후배 양봉진(한경닷컴 사장)은 "어느날 'MIT로 옮기기 위해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양복이 없다'며 백화점에 같이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부잣집 아들 티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출처 : 정♡사♡모♡..김♥영♥명♥
글쓴이 : 법학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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